‘공공기관 5년내 여성임원 30%’ 법안 내놨지만…

동아일보

입력 2013-02-21 03:00:00 수정 2013-02-21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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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1급은 2.6%뿐… 후보 부족 발동동

“1970, 80년대만 해도 ‘광산 근처에 여자가 오면 망한다’는 말이 있었죠. 여성은 에너지 관련 업무엔 접근도 못했습니다. 공학을 전공한 여성이 드물어 지원자 자체도 적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여성 임원을 만들어내라고요?”

에너지 관련 공기업 A사의 한 관계자는 20일 이렇게 하소연했다. 이 공기업에는 임원은 물론이고 그 바로 아래 직급인 1급(실장, 처장)에도 여성이 한 명도 없다. 2급(부장)에 한 명 있지만 그나마 조기 승진한 사례다.

그는 “이것저것 살피지 않고 파격적으로 승진시키거나 외부 인력을 수혈하지 않는 한 수년 내에 여성 임원을 배출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여성 간부가 턱없이 부족한 공공기관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공공기관에 여성 관리자 목표제를 도입하겠다고 공약한 데다 여성 임원 비율을 획기적으로 높이라는 법안이 발의됐는데 임원은 물론이고 임원 후보군인 1급에도 여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 등 국회의원 62명은 지난달 공공기관의 여성 임원 비율을 3년 내 15%, 5년 내 30%로 높이는 법안을 발의했다.


○ 2급 간부도 4.2%에 그쳐

지난해 말 현재 공공기관 149곳의 1급 여성 간부 비율은 2.6%(80명)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아일보가 김한표 새누리당 의원실을 통해 국회 입법조사처에 조사를 의뢰해 공공기관 288곳 가운데 149곳(공기업 28곳 전체와 준정부기관 50곳, 기타 공공기관 71곳)의 임원 및 간부 현황을 파악한 결과다. 특히 공기업의 1급 여성 비율은 0.8%(13명)에 그쳤다. 한국중부발전, 한국감정원, 지역난방공사 등 12곳은 2급에도 여성이 없었다.

2급도 부족하긴 마찬가지다. 공공기관 149곳의 2급 여성 간부는 총 409명으로 전체의 4.2%에 그쳤다. 공기업은 그 비중이 1.0%(49명)밖에 안 됐다.

현재 공공기관 288곳 전체의 여성 임원 비율은 비상임이사까지 모두 포함해 8.8%다. 그나마 공기업은 0.6%에 불과하다. 30%를 맞추려면 634명을 더 채워야 하는 상황이다.


○ “외부 수혈밖에 답 없다”


공공기관들은 여성 간부가 적은 이유로 1999년 폐지된 군 가산점과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를 들었다. 공기업 B사의 한 남성 실장(1급)은 “공공기관은 필기시험 성적이 당락을 결정하는데 군필자에게 필기 성적의 3∼5%를 가산점으로 주다 보니 입사 동기 40명 중 여성은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며 “그중 육아, 가사 등으로 나간 동기를 빼면 현재 2명만 남았다”고 말했다.

남성 중심의 조직문화에서 살아남기 어려웠다는 분석도 있다. 공기업 C사의 3급(차장) 여성은 “간부급 여성 대부분이 연구직에 몰려 있다”며 “영업력이나 리더십보다 본인의 업무능력으로만 평가받는 연구직을 빼고는 승진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전했다.

공공기관들은 여성 임원 비율을 억지로 채우려면 비상임이사를 늘리는 방법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준정부기관 D사 관계자는 “외부에서 비상임이사를 데려오면 직원들의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현재 공기업 중 여성 임원을 한 명씩 둔 한국관광공사와 한국수자원공사도 여성 임원은 모두 비상임이사다.

남성 직원들에 대한 ‘역차별’도 예상되는 문제다. 준정부기관 E사의 한 직원은 “‘여성 임원을 확충하라’는 전임 사장의 지시 때문에 승진연차가 안 됐는데도 3명이나 부장으로 조기 승진했다”며 “어느 남자 직원이 그를 따르고 싶겠느냐”고 털어놓았다. 이렇다 보니 공공기관의 과장급 이하 여직원들 사이에선 “무리하게 여성 임원을 채워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 오히려 일 잘하는 여성이 피해를 볼 수도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 대기업은 여성 임원 100명 돌파

반면 대기업의 여성 임원 수는 급격히 증가하는 추세다. 헤드헌팅업체 유니코써어치는 매출 기준 국내 100대 상장사의 여성 임원 수가 처음으로 100명을 넘어섰다고 20일 밝혔다. 2010년만 해도 그 수가 51명에 그쳤지만 15일 현재 33개 기업이 114명의 여성 임원을 고용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전문가들은 여성 임원이 증가하는 현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여성 임원 비율을 30%까지 높이라는 할당제에 대해선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박길성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그동안 여성들이 역량에 비해 승진에서 차별을 받아왔기 때문에 부서와 직급을 막론하고 평가체계를 공평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다”며 “여직원들의 역량을 높이고 철저하게 검증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창순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할당제를 도입하기보다는 워킹맘들의 보육을 지원하거나 부부들의 가사 분담을 통해 자연스럽게 여성이 일에 집중하는 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강유현 기자 yh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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