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신광영]‘벼락거지’ 되는 것 말고도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들

신광영 사회부 차장

입력 2021-03-19 03:00 수정 2021-03-1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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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사회부 차장
“몇 달째 집 알아보다 대상포진 걸렸어요. 아이 계획은 없습니다. 집 사면 둘이 평생 갚아야 하는데… 아이까지 이 끝없는 불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네요.”

한 유명 경제 유튜버가 진행하는 생방송 부동산 상담에는 무주택자들의 고군분투 사연이 매주 수백 통씩 몰린다. 사연자들은 가족관계와 거주지, 현 자산, 월 소득 같은 각종 현실적인 용어들로 자신을 소개하는데 자녀 계획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하는 신혼부부가 많다.

사연은 하나하나가 ‘인간극장’이다. 남편의 사망보험금 3억 원으로 ‘정신지체’ 아들과 살 집을 찾는 50대 여성, 은퇴한 부모와 취업준비생인 동생 생활비 대느라 월급이 남아나질 않는데 다음달이 전세 만료인 30대 남성, 미용실 보조로 최저시급 받으며 6년 간 3000만 원을 모았지만 최근 임신해 프로포즈를 받고도 집구할 길이 막막해 결혼을 포기하려는 20대 여성까지.

미국 아칸소에 정착해가는 한국 이민자 가족을 그린 영화 ‘미나리’에는 가장인 제이콥(스티븐 연)이 농장에 우물 만들 곳을 찾다가 어린 아들에게 “한국 사람은 머리를 써”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병아리 감별사로도 일하는 그는 병아리가 수컷으로 분류되는 순간 버려진다면서 아들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돼야한다”고 한다. 미나리처럼 어디에 심어도 살아남는 한국인의 ‘DNA’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사연 속의 무주택자들에게도 그런 한국인의 생명력이 엿보이곤 한다. 사는 게 바빠 성실히만 살아오다 어느 순간 벼랑 끝에 몰렸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다는 집념이 전해져올 때가 있다.

배우자가 남긴 피 같은 보험금을 허투루 쓸까봐, 아기가 방긋 웃어주고 정비사와 택배기사로 ‘투잡’ 뛰는 남편이 고마워서, 암 투병 사실을 숨기고 숨을 거두기 한 달 전까지 일용직을 하며 결혼자금을 보태준 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어서….

진행자가 사연을 읽어 내려가다 다음 문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순간들도 종종 있다.

하지만 정부에 기대할 수 있는 게 없어 각자도생의 길로 접어든 이들은 나름의 절박한 사연을 안고 ‘영끌’의 세계로 불나방처럼 뛰어든다. 각각의 치열한 삶들이 한국의 비좁은 땅을 두고 맞부딪히는 형국이다.

무주택자들이 독한 현실에 단련되는 사이 우리를 지탱해온 소중한 가치들은 설 자리를 잃어간다. 땅 투기하다 잘려도 시세차익이 평생 월급보다 많을 수 있는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정직, 근면, 절제는 허무한 슬로건일 수밖에 없다.

열정과 도전 같은 가치는 이제 사치로 여겨진다. 2030세대 상당수에게 직장은 대출을 받고, 갚기 위해 다니는 곳이 되어 버렸다. 결혼 상대마저도 ‘나만큼의 자산을 갖고 있어서 둘이 합치면 상급지 아파트로 갈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고 한다.

최근 출간된 베스트셀러 ‘돈의 심리학(저자 모건 하우절)’에 이런 대목이 있다.

“사람들은 세상의 원리에 대해 저마다의 경험을 갖고 있다. 내가 겪은 일은 간접적으로 아는 내용보다 훨씬 설득력이 강하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돈의 원리에 대한 나름의 관점을 닻으로 삼아 인생을 살아간다.”

투기와 반칙을 일상적으로 목격하고, 유주택자가 아니면 언제든 실패한 인생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집단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우리는 무너져가는 가치들을 다시 세울 수 있을까.

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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