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이재용 19개월 수사하고도 구속 필요성 충분히 소명 못했다

배석준 기자 , 황성호 기자 , 박상준 기자

입력 2020-06-10 03:00:00 수정 2020-06-10 03: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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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소명 부족” 영장 기각
“기본적인 사실관계는 소명돼… 책임 유무는 재판서 따져봐야”


서울구치소 나서는 이재용 9일 오전 2시경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면서 이 부회장이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영장 심사 전후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던 이 부회장은 취재진의 질문에 “늦게까지 고생 많으셨다”는 말만 하고 차량에 올랐다. 의왕=뉴시스

“불구속 재판의 원칙에 반하여 피의자들을 구속할 필요성 및 상당성에 관하여는 소명이 부족하다.” 8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52·사진)과 최지성 전 부회장(69), 김종중 전 사장(64) 등에 대한 8시간 37분간의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심리한 서울중앙지법 원정숙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9일 오전 2시경 영장 기각 사유를 이렇게 밝혔다.

검찰이 트럭에 실어 법원에 제출한 400권, 총 20만 쪽 분량 등의 구속영장 관련 기록을 보고, 마라톤 영장심사를 했지만 구속 필요 사유에 해당하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취지로 해석할 수 있다. 약 19개월 동안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 의혹으로부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 등으로 수사 범위를 넓혀온 검찰로서는 사실상 수사의 최종 목표였던 삼성 경영진에 대한 신병 확보에 실패한 것이다. 앞서 서울중앙지검 경제범죄형사부(부장검사 이복현)는 이 부회장 등에 대해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및 시세조종, 외부감사법 위반 혐의로 4일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원 부장판사는 143자의 짤막한 기각 사유에서 영장전담판사들이 자주 쓰는 ‘범죄’ ‘혐의’라는 단어를 이례적으로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삼성은 변호인단 명의로 “향후 검찰 수사심의 절차에서 엄정한 심의를 거쳐 수사 계속과 기소 여부가 결정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번 결과와 무관하게 법과 원칙에 따라 향후 수사에 만전을 기할 것”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지난해 김태한 삼성바이오로직스 대표에 대해 분식회계 혐의로 두 차례 청구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데 이어 이 부회장 등의 구속영장이 또 기각돼 2018년 11월부터 이어진 검찰 수사의 적정성을 놓고 비판이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 판사 ‘범죄 혐의’ 언급 안해… 檢, 추가조사-영장 재청구 않기로 ▼

구속 필요성 소명 부족

“검찰 내부에서 절반 이상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영장 청구를 반대했을 것이다.”

이 부회장 등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9일 검찰 관계자는 이렇게 탄식했다. 또 다른 검찰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외부 전문가에게 기소 여부를 판단해 달라며 검찰수사심의위원회 회의 소집을 신청한 이틀 뒤 검찰이 곧바로 영장을 청구하는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면서 “윤석열 검찰총장 전임인 문무일 전 총장 때 만든 제도인데, 이걸 무력화하는 모습으로 비쳤다”고 했다. 검찰 출신 변호사는 “이 부회장 영장 기각으로 검찰이 앞으로 더 고립될 것 같다”고 우려했다.

○ 구속 필요 사유 소명 부족
형사소송법상 구속 필요 사유는 크게 △사안의 중대성 △증거인멸 우려 △도주 우려 등이다. 원 부장판사는 가장 먼저 “기본적 사실관계는 소명됐고, 검찰은 그간의 수사를 통해 이미 상당 정도 증거를 확보했다고 보인다”고 밝혔다. 검찰은 2018년 11월 금융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가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 의혹을 고발한 이후 19개월간 수사를 해왔다. 삼성 계열사 등을 50여 차례 압수수색 하고, 110여 명을 430여 회 조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상적으로 구속 수사는 신속한 진상 규명을 위해 필요한데 법조계에선 수사 기간이 길어지고, 압수수색 등 강제 수사 횟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영장 발부 가능성이 더 낮아진다고 본다. 수사기관이 이미 증거를 충분히 확보한 만큼 피의자가 없앨 증거 자체가 사라진다. 또 헌법상 권리인 피의자의 방어권 보장을 위해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으면서 유무죄를 다투라는 취지로 판사가 인신 구속을 신중하게 판단한다는 것이다. 원 부장판사가 ‘검찰이 상당 정도 증거를 확보했다’고 표현한 것도 이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이 부회장은 글로벌 기업의 총수로서 또 다른 구속 필요 사유인 도주 우려는 검찰조차 처음부터 전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 “기본적인 사실관계 소명” 놓고 정반대 해석
‘기본적인 사실관계는 소명됐다’는 원 부장판사의 기각 사유를 놓고는 검찰과 이 부회장 측 변호인단의 시각이 크게 엇갈렸다.

검찰은 이 부회장 등의 구속영장에 적시한 의혹을 원 부장판사가 인정한 것으로 해석했다. 이 때문에 원 부장판사가 “이 사건의 중요성에 비춰 피의자들의 책임 유무 및 그 정도는 재판 과정에서 충분한 공방과 심리를 거쳐 결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기소해서 재판을 받아볼 만큼 검찰 수사 결과가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는 1차 판단을 받았다는 것이 검찰의 해석이다.

반면 이 부회장 측 변호인단은 “‘기본적 사실관계’ 외에 피의자들의 책임 유무 등 범죄 혐의가 소명되지 않았다는 취지”라는 입장문을 내놨다.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나 시세조종, 외부감사법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해서 원 부장판사가 소명됐다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합병 과정에 대한 사실관계 등만 검찰 수사로 교통정리가 됐다는 취지다.

통상적으로 법원의 영장전담 판사들은 ‘범죄 혐의가 소명되지 않았다’거나 ‘범죄 성립 여부에 다툼의 여지가 있다’ 등으로 영장 기각 사유를 설명한다. 하지만 원 부장판사는 기본적인 사실관계라는 법률 용어를 사용했다. 범죄나 혐의라는 단어를 기각 사유에 등장조차 시키지 않았다. 이에 대해 법관 출신의 한 변호사는 “기본적인 사실관계는 ‘팩트 찾기’(fact finding)에 관한 것이고, 여기에 ‘법적 평가’까지 들어가야 범죄 혐의가 되는데 그 부분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해석했다.

○ 검찰, 영장 재청구나 추가 조사 않기로
검찰은 이 부회장 등에 대한 영장 재청구나 추가 조사 없이 이 부회장 등을 불구속 기소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중앙지검 검찰시민위원회는 11일 대검찰청 수사심의위에 이 부회장 사건을 부의할지를 먼저 결정한다.

만약 부의된 뒤 학자와 시민단체, 법조인 등으로 구성된 수사심의위가 이 부회장에 대한 불기소 결정을 하게 되면 검찰은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수사심의위 운영지침에 따르면 수사심의위의 결론은 구속력은 없지만 수사팀에서 ‘존중’하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수사심의위의 결론을 뒤집고, 기소했는데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게 되면 구속영장 기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역풍이 불 수 있다. 이 부회장이 수사심의위 회의를 요청한 지 이틀 만에 영장 청구를 강행했다가 기각된 검찰로서는 더 부담을 느낄 수 있다.

검찰 출신 변호사는 “수사심의위 결정이 수사팀에 출구 전략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구속영장까지 청구한 피의자를 검찰이 기소조차 하지 않는 것은 검찰 스스로 납득하기 어렵다는 내부 여론이 우세한 편이다.

배석준 eulius@donga.com·황성호·박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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