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 해외학회에 열흘 출장… 보고서는 달랑 ‘최신 연구 접함’

신동진기자 , 정동연기자

입력 2016-10-14 03:00 수정 2016-10-1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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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대학 지원 R&D출장 예산 줄줄

 올 5월 발광키트 관련 정부 연구개발(R&D) 과제를 수행 중인 서울의 한 사립대 전기공학과 대학원생 2명은 크로아티아에서 열린 나노기술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10박 12일의 출장을 다녀왔다. 나흘뿐인 학회 일정을 마치고 6일을 더 머물다 온 출장 보고서의 성과는 ‘최근 연구결과를 접함’ ‘연구아이디어 획득’이 전부였지만 총 520만 원의 출장비가 지원됐다.

 소방구난장비 R&D 과제를 맡은 또 다른 대학 연구팀이 쓴 7월 미국 뉴욕 출장보고서엔 13일간 8개 일정 대부분이 의류행사 참관이나 소방박물관 방문 등 ‘관광’이었다. 이들은 미국에서 ‘한국섬유전’을 관람하는 등 과제와 큰 관련이 없는 일정을 위해 7명이 단체로 총 4300만 원의 출장비를 지원받았다.

 정부의 예산 지원을 받아 과학기술 기초원천분야 R&D 과제를 수행하는 일부 연구원들이 국비로 가는 해외출장 프로그램을 ‘제멋대로’ 운용한다는 사실이 13일 밝혀졌다. 하지만 예산을 집행하고 평가하는 한국연구재단 등 정부위탁기관들에서 이 같은 부적절한 출장을 적발한 사례는 한 번도 없어 R&D 연구비 관리에 큰 구멍이 났다는 지적이 나온다.


○ R&D 효율 저해하는 연구비 비리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소속 김재경 새누리당 의원과 동아일보가 2015∼2016년 미래창조과학부 소관 기초원천 R&D 사업 예산으로 집행된 대학과 민간기업 연구원의 해외출장 보고서 중 658건을 입수해 분석한 결과 부적절한 사례가 많았다. 출장기간 중 연구과제와 상관없는 개인일정을 넣거나 출장의 성과를 확인할 수 없는 한두 줄짜리 출장보고서가 54건이나 확인됐다. 미래부 소관 총 21개 사업 7170개 과제 중 5개 사업 140개 과제를 무작위로 선정해 분석한 결과다.

 미세먼지 저감기술을 연구하는 한 업체는 지난해 말 연구과제를 받아 자사 마스크 판매를 위한 동남아 시장 조사를 위해 830만 원의 출장비를 타갔다. 프랑스의 휴양지 코르시카 섬에서 열린 세미나 참석차 7박 9일 출장을 다녀온 대학원생 이모 씨(25)는 “학회에 참석해 공부”라는 한 줄짜리 보고서를 냈다. 연구협약에서 해외출장 비용이 총 과제비의 평균 3∼7%를 차지하는 점을 고려하면 내년도 기초원천분야 과제형 R&D 예산안 1조5589억 원 중 많게는 1091억 원에 해당하는 연구비가 사실상 ‘검증 무방비’ 상태인 셈이다.

 해외출장 외에도 대학가의 R&D 연구비 유용은 관행처럼 퍼져 있다. 대구지법은 지난달 8일 인건비 허위지급신청 등으로 2억여 원을 편취한 혐의(사기)로 A대학 조경학과 나모 교수(55)에게 벌금 1000만 원을 선고했다. 나 교수는 2012∼2014년 연구원들이 지방출장을 간 것처럼 허위로 꾸며 수백만 원의 출장비를 챙겼다. B대학 수학과 최모 명예교수(68)는 아들이 R&D 과제에 참여한 것처럼 허위로 꾸며 인건비를 청구하는 등의 방법으로 1억2000만 원을 받아 회식비 등에 사용해 올 3월 징역 8개월이 확정됐다. 감사원이 2008∼2012년 국가 R&D 사업을 감사한 결과 548건 중 306건(55.8%)이 연구비의 부적절한 사용에 대한 지적이었다.


○ 눈먼 나랏돈 마음대로 쓰는 민간연구기관

 연구비 비리는 연구자의 모럴해저드뿐 아니라 부실한 연구관리제도 탓도 크다. 2008∼2012년 연구비 부정사용으로 지적받은 3663명 중 기업(84.7%)과 대학(12.2%) 소속이 90%가 넘는다. 정부출연연구원과 국공립연구소 등은 감사원 감사나 국정감사에서 연구비 사용 비리가 여러 차례 불거져 항공 마일리지 파악 등 관리가 잘되는 편이지만 사립대나 기업체 연구원들은 기관별로 검증기준이 제각각이라 제멋대로 쓰다 걸린 것이다. 이들을 관리하는 정부위탁 기관에서 결과보고서 등 성과감사보다 영수증 증빙 같은 형식적인 회계감사를 하고 있어 나온 현상이다.

 김재경 의원은 “연구비 비리로 R&D 투자에 대한 국민의 부정적 여론이 늘고 있다. 당장 효과가 나타나지 않지만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한 공공 R&D의 성공을 위해서는 국민의 이해와 지지를 이끄는 실효성 있는 연구비 관리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국민 1인당 공공 R&D 재원부담 규모는 1998년 5만5000원에서 올해 37만6000원으로 급증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실장은 “R&D 사업에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연구자 중에서 연구 예산을 따기만 하려는 ‘마피아’가 존재하는 것도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신동진 shine@donga.com·정동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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