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여성’ 앨리스 제임스, 억압의 경험을 이야기하다

이지훈 기자

입력 2022-09-14 03:00:00 수정 2022-09-14 03:23:41

|
폰트
|
뉴스듣기
|
기사공유 | 
  • 페이스북
  • 트위터
연극 ‘앨리스 인 베드’ 18일까지 공연
수전 손태그 희곡 ‘앨리스…’ 각색
여배우 7명, 앨리스-타인 겸해 연기


침대에 갇힌 앨리스(왼쪽에서 두 번째·성수연)와 티타임에 초대된 마거릿(왼쪽·황순미)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국립극단 제공

앨리스 제임스(1848∼1892)는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리며 평생 병상에 갇혀 지내다 44세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난 비운의 여성이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엄 제임스. 오빠는 소설 ‘여인의 초상’을 쓴 미국 문학의 거장 헨리 제임스다. 앨리스가 누구의 딸, 누구의 동생이 아닌 ‘일기작가’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된 건 사후 88년이 흐른 뒤다. 그가 생전 병상에서 쓴 일기 ‘앨리스 제임스 전기’가 1980년 출간되면서다.

평론, 에세이, 소설을 넘나든 뉴욕 지성계의 여왕 수전 손태그(1933∼2004)가 남긴 유일한 희곡 ‘앨리스, 깨어나지 않은 영혼’은 앨리스 제임스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손태그의 희곡을 각색한 연극 ‘앨리스 인 베드’가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막이 오르면 앨리스(성수연)가 앉아 있는 침대 위엔 매트리스 더미가 매달려 있다. 침대에 갇힌 앨리스에게 다가온 아버지(이리)와 오빠 해리(이리, 성수연)는 자신들의 해석으로 앨리스의 상태를 규정하며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주문한다.

작품의 핵심은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티타임 장면을 빌려온 대목에 나온다. 앨리스와 여성 4명이 등장해 차를 마시며 각자 여성으로서 겪은 억압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4명의 여성은 19세기 두 여성 작가 에밀리 디킨슨(신사랑)과 마거릿 풀러(황순미), 발레극 ‘지젤’ 속 결혼식 전날 죽은 젊은 여성들의 유령 미르타(김광덕)와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에서 선과 악을 오가는 여성 쿤드리(김시영)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이들의 대화에 담겼다.

공연 후반부 앨리스는 물건을 훔치기 위해 침입한 젊은 남자(권은혜)를 만나며 침대를 떠나 자유롭게 걷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완벽한 자유를 얻는 건 아니다. 공연은 개운치 못한 뒷맛을 남기며 막을 내린다. 출연 배우 7명은 모두 여성. 이들은 각각의 장면에서 앨리스가 되거나 앨리스와 대화를 나누는 인물이 된다. 여러 배우가 앨리스와 타인을 겸해 연기한다. 다양한 시선으로 앨리스와 조우하려는 연출가의 의도가 담겼다.

18일까지, 4만5000∼6만 원.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