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양이와 파라솔

노트펫

입력 2019-06-17 08:07 수정 2019-06-17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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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펫] 고양이는 특정한 장소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고양이가 집착하는 대상이 특정한 장소일 수도 있고, 그 장소에 있는 어느 물건이 될 수도 있다.

고양이가 어느 것에 집착하는지는 약간의 관찰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미국 임대주택인 듀플렉스(duplex)에서 생활할 때, 고양이의 그런 집착을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미국 집주인들은 한국인 세입자를 선호한다. 한국인은 미국인들과는 달리 실내에서 신발을 신고 다니지 않으므로 비교적 깨끗하게 집을 사용하는 편이다.

집주인 입장에서는 수리비가 들지 않으니 좋은 일이다. 또한 한국인은 성격이 깔끔하여 월세납부에 한 치의 오차가 없다. 집주인 입장에서 이보다 좋은 세입자들은 없을 것 같다.

필자가 살던 듀플렉스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그 집에서 살던 세입자도 한국인이었다. 그는 필자의 가족을 위해 많은 물건들을 남겨 놓았다. 그 중에는 파라솔(parasol)도 있었다.

뒷마당의 파라솔은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제공할 수 있다. 사람들과 그 밑에서 시원하게 맥주 한 잔을 즐기기에도 좋다. 파라솔에 대한 기대는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이다. 애석하게도 뒷마당의 파라솔은 이미 고물이었다. 기둥 가운데가 파손되어 수리할 수도 없었다. 고장 난 큰 우산이었다. 공간만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겁고 큰 파라솔은 치우기도 귀찮았다. 그래서 한 달 가까이 뒷마당에 방치해두었다.

어느 토요일 아침, 물을 마시기 위해 부엌으로 나왔다가 파라솔 위에서 잠을 자는 고양이를 보게 되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메리칸 숏헤어(American Shorthair) 혹은 그 믹스종 같았다.

부엌에서 그릇을 만지면 소리가 나서 고양이의 단잠을 깨울 것 같았다. 그래서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일요일 아침에도 그 고양이는 그 자리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망가진 파라솔은 필요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길고양이에게는 안락한 잠자리를 제공하는 침대였던 것이다. 누군가에는 필요 없어도, 다른 이에게는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파라솔을 뒷마당에 방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쓰레기 배출 날짜에 맞춰 파라솔을 월요일 아침 일찍 현관 앞 우체통에 내놓았다. 필자가 살던 곳은 매주 월요일 아침에 청소차가 와서 쓰레기를 수거해갔다.

그래서 정해진 시간에 맞춰 폐기물을 집 앞 우체통에 놓아두어야 한다. 그 시간을 놓치면 냄새나는 쓰레기를 일주일이나 뒷마당이나 차고에 보관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낡은 파라솔을 치우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고양이 때문이었다. 파라솔을 집에서 치워버리면 고양이가 다시는 뒷마당에 올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런 불길한 기분은 현실이 되었다.

다음날 파라솔을 치운 자리에 다른 물건들을 배치했다. 외관은 훨씬 좋아졌다. 손님들도 그와 비슷한 말을 했다. 하지만 그 말이 우울한 기분을 위로하지는 못했다.

파라솔을 치운 그날 이후 고양이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만 되면 뒷마당에 고양이가 있는지 관찰했지만, 그 고양이는 필자가 귀국하는 날까지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고양이가 집착한 것은 듀플렉스의 뒷마당이라는 특정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 뒷마당에 있던 오래된 파라솔이었다. 고양이 입장에서는 자신의 침대였던 파라솔이 사라진 뒷마당은 아무 의미 없는 공간이었다. 침대와 침실을 모두 잃은 고양이는 그날 이후 발길을 끊고 말았다.

이강원 동물 칼럼니스트(powerranger7@hanmail.net)

* 본 기사의 내용은 동아닷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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