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씩 그려낸 1969장의 바다 속에는 그리움이 일렁인다

손택균 기자

입력 2021-03-12 03:00 수정 2021-03-12 0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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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성 작가 ‘수공 애니메이션’
오일파스텔화 스캔 후 연결해 구성
“기약 없어진 풍경 향한 갈망 담아”


이우성 작가의 ‘어쩌면 우리에게 더 멋진 일이 있을지도 몰라’. 이 작가는 “바람과 시간의 중첩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후속 영상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두산갤러리 제공

요즘은 필름 영사를 통해 셀 애니메이션을 만날 기회를 얻기 어렵다. ‘나무를 심은 사람’(1987년)처럼 널리 알려진 작품들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지만 모두 디지털로 변환한 영상이다. 컷에 남은 수작업의 흔적에서 아날로그 애니메이션의 차별성을 희미하게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31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갤러리에서 열리는 이우성 작가(38)의 개인전 ‘어쩌면 우리에게 더 멋진 일이 있을지도 몰라’는 20세기 수공 애니메이션의 기억을 어렴풋이 떠올리게 만드는 전시다.

구성은 단출하다. 갤러리 벽면 하나를 차지한 스크린에 걸린 6분 32초 길이의 영상이 메인 작품이다. 영상을 구성한 오일파스텔화 1969장 중 25점을 나머지 벽면에 갈무리해 걸어놓았다.

보여주는 것은 그저 평온한 바다의 모습이다. 움직이는 해안선과 일렁이는 파도, 물보라에 튕기며 반짝이는 햇살을 먼발치에서 또는 가까이 다가가서 담아낸 이미지들. 누구든 해변을 거닐 때면 하염없이 바라보게 되는 익숙한 풍경이다.

일상의 공간과 인물들을 관찰해 회화 소재로 삼아 온 이 작가는 지난해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컴퓨터와 온라인 환경 안에 갇혀버린 듯한 하루하루”를 보내며 이 작업을 시작했다. 재료는 2016년 뉴질랜드에 머무는 동안 촬영한 해질녘 바다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다. 노트북 모니터에 영상을 걸어두고 한 프레임씩 멈추며 OHP 필름을 올려 윤곽과 색채를 본떴다. 3개월 동안 1969장을 그린 후 하나씩 수작업으로 스캔해 연결된 영상 파일을 만들었다.

“가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다시 갈 수 없게 된 장소, 보고 싶은데 언제 직접 볼 수 있을지를 기약할 수 없게 돼버린 풍경, 만나서 얼굴을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당분간은 그럴 수 없게 된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다.”

파도 소리는 없다. 영상 위로 ‘회색과 청색 사이’ 등 피아노 독주 세 곡이 흐른다. 이 작가의 고등학교 동창인 재불 피아니스트 어자혜 씨가 중간 작업물을 전송받아 리옹 연습실에서 즉흥으로 연주해 녹음한 곡들이다. 이 작가는 “화상회의 앱으로 연락해 ‘혼자 바닷바람을 맞으며 막연한 기대를 품고 산책했던 기억’에 대한 이야기만 건넸다. 각자의 해석대로 영상과 음악을 완성해 더 흥미로운 결과물이 나온 듯하다”고 말했다.

어떤 이유로 찾아오든 바다는 방문자에게 늘 기대 이상의 감흥을 선물한다. 종로 골목에서 만나는 파도의 일렁임 역시, 전시 표제에 수긍할 짤막한 여유를 안겨준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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