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종의 오비추어리]명품 핸드백 ‘코치’의 아버지 마일스 칸

이유종기자

입력 2017-03-01 10:44:00 수정 2017-03-01 10:4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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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뉴욕 타임스 코치 창업주 마일스 & 릴리안 칸 부부
고급 여성 핸드백 ‘코치(coach)’의 창업주 마일스 칸이 10일 미국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95세. 귀족들이 타던 ‘사륜마차’를 뜻하는 코치는 핸드백 의류 신발 등을 만드는 미국의 대표적인 브랜드다. 칸은 가죽 공방을 인수한 뒤 유명 디자이너 보니 캐신을 영입해 독특한 디자인의 여성용 핸드백을 출시하며 명품 브랜드로 성장했다. 코치는 현재 전 세계 1000개 이상의 직영 매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지난해 매출액 45억 달러(약 5조 850억 원)를 올렸다. 임직원만 1만 7000명이다.




● 맨해튼 가죽 공방에서 출발


코치는 1941년 가죽 장인들이 뉴욕 맨해튼 34번가에서 운영하던 공방이 모태다. 직원 6명이 남성용 가죽지갑과 작은 가죽 제품을 손으로 만들었다. 칸과 아내 릴리안은 1946년 이 공방에 합류했다. 부동산 업자였던 칸의 아버지가 이 공방의 투자자 4명 중 한 명이었다. 칸 부부는 이전에도 가죽제품 제작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고 1950년 이 공방을 완전히 인수했다. 칸 부부의 공방은 1961년까지도 남성용 지갑을 만들었다. 판매량은 신통치 않았다. 칸은 2008년 발간된 자서전 ‘마이 스토리’에서 “몇 명의 고객이 전부였다”고 회고했다.

아내 릴리안은 1960년 칸에게 여성 핸드백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칸은 2013년 아내 릴리안이 사망했을 때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처음에 비웃었다. 당시 뉴욕에는 엄청난 숫자의 핸드백 회사들이 있었다. 모든 가게들은 유럽에서 유행하는 디자인을 베낀 짝퉁 제품을 팔았다. 그러나 내 아내가 곧 이들을 압도했다”고 말했다. 당시 미국에선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고 있었다. 여성용 가방 수요도 덩달아 증가했다.

당시 여성용 핸드백은 대체로 얇은 가죽으로 만들었다. 칸 부부는 차별화를 추구했다. 두툼하고 견고하나 부드러운 가죽을 원했다. 릴리안은 가죽이 부드럽게 마모되는 ‘낡은 야구 글러브’에서 착안해 무두질(Tanning)을 거쳐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글러브 탠드 카우하이드(Glove Tanned Cowhide)’을 만들어냈다. 글러브 탠드 카우하이드는 코치만의 고유한 가죽 재질로 자리를 잡아 다른 브랜드들과는 차별화를 꾀할 수 있었다.

칸 부부는 1961년 공방을 확대해 ‘코치가죽의류회사(Coach Leatherwear Company)’를 출범시키고 ‘코치’ 로고가 부착된 여성용 핸드백을 출시했다. 같은 해 할리우드에서 배우들의 의류를 제작했던 디자이너 보니 캐신(Bonnie Cashin)을 영입했다. 캐신은 코치 컬렉션의 1세대를 이끈 인물이다. 1950년 화장품 및 향수 회사인 코티사가 패션 디자이너에게 수여하는 미국코티패션비평상(1942년 제정)을 받았으며 뉴욕타임스에 1950년대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소개된 베테랑이었다.


● 유명 디자이너 영입으로 도약


캐신은 코치 제품을 업그레이드했다. 1962년 코치는 캐신이 디자인한 가죽 가방, 액세서리 컬렉션 ‘캐신 캐리’를 출시했다. 캐신은 강아지 목줄의 클립을 보고 가방과 가방끈의 연결장치를 고안해 ‘도그 리시 클립’을 만들었다. 자신이 타고 다니던 컨버터블 자동차의 지붕 고정장치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턴록 클로저(잠금 장치)’로 핸드백에 적용했다. 당시 이런 디자인을 선보이는 브랜드는 흔하지 않았다.

캐신의 노력으로 다양한 가방 액세서리는 코치의 아이콘이 됐다. 코치는 1970년대 초 글러브 탠드 카우하이드 가죽으로 만든 클래식한 모양의 더플백(실린더 모양의 큰 가방)을 내놓아 큰 인기를 얻었다. 1974년 코치 마크가 새겨진 가죽 조각인 행태그를 달았다. 코치는 1970년대 후반 카탈로그 마케팅, 우편발송 시스템 등으로 경영 부문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하며 매출을 크게 늘렸다. 백화점에 크게 의존하는 경쟁자들과는 달리 일반 가게들과 새로운 유통망을 만들어 경쟁력을 키웠다. 1981년 뉴욕 메디슨가에 첫 번째 플래그십 스토어(특정 상품 브랜드를 중심으로 브랜드의 성격과 이미지를 극대화한 매장)를 열었다. 코치는 1980년대 초까지 매년 2000만 달러 이상의 핸드백을 팔았다.


● 염소치즈에 매달린 말년


칸 부부는 1985년 3000만 달러를 받고 식음료 기업 새러리(Sara Lee)에 코치를 넘겼다. 당시 칸은 64세였다. 칸 부부는 1985년 뉴욕 주 컬럼비아 카운티에 600에이커(약 73만 평) 규모의 염소농장 ‘코치팜’을 운영하고 있었다. 코치팜은 초창기 염소 200마리를 키웠다. 하지만 염소가 1500마리로 늘자 칸 부부는 아예 농장에 전념하기로 했다. 코치팜은 친환경 유기농 제품의 붐과 맞물려 염소 젖으로 만든 치즈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칸 부부는 20년 이상 농장을 운영하다 칸이 85세이던 2006년 농장을 팔고 생업에서 은퇴했다.

칸은 러시아 출신 유대계 이민자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의 부모는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미국으로 이주했다. 칸은 뉴욕시립대 경영학과를 졸업했고 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육군에서 복무했다. 헝가리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아내 릴리안과는 1947년 결혼했다. 칸은 좀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는 베트남 전쟁 당시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을 겨냥해 전쟁 반대 광고를 뉴욕타임스에 싣기도 했다. 코치의 경영을 맡았을 때는 노조가 제시하는 액수 보다 더 많은 급여를 직원들에게 지급했다. 코치의 아버지는 이제 세상을 떴지만 차별화를 추구하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코치의 혁신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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