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5명이 지시한 원격진료, 시범사업만 하다 19년 허송세월

특별취재팀

입력 2019-04-01 03:00 수정 2019-04-01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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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위에 공무원, 규제공화국에 내일은 없다]
<1> ‘복지부동’ 벽에 막힌 규제혁파… 말만 요란했던 역대 정권




“대통령이 콕 집어 말했는데도 안 바뀌더라고요. 겉으로는 완화한다고 하지만 속내는 규제 일변도예요.”

김필수 한국자동차튜닝산업협회장(대림대 교수)은 자동차 튜닝에 대한 정부의 규제 혁파 의지를 느낄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이 강조해도 공무원들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인 2014년 3월 청와대에서 제1차 규제개혁장관회의가 열렸다. 한창 ‘손톱 밑 가시’ 없애기가 화두였던 시점. 회의에서 장형성 당시 한국자동차튜닝협회장(신한대 교수)이 건의한 튜닝 규제 완화가 테이블에 올랐다. 규제를 풀면 새로운 시장을 열 수 있는 대표적 분야라는 공감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첫 규제개혁회의에서 주요 안건으로 소개되자 국토교통부와 산업통상자원부 등 유관 부처는 “올해가 튜닝산업 원년”이라면서 산업진흥책을 내며 관련 규제를 완화하겠다고 약속했다. 5000억 원인 튜닝차 시장의 규모가 2020년이면 4조 원으로 커진다는 청사진도 내놨다.

그러나 튜닝차 시장은 여전히 5000억 원 규모다. 규제개혁회의가 열린 뒤 잠깐 동안 튜닝부품인증제 도입, 승인 절차 간소화 등 규제 완화 정책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집권 3년이 지나자 규제 완화 얘기가 쏙 들어갔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정권 초기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공무원이 반짝 규제 완화를 하는 척하다가 대통령의 힘이 빠지면 없었던 일이 되는 공직사회의 관행 탓이다.

김필수 협회장은 “지엽적인 부분만 살짝 규제를 완화하고는 공무원들이 규제를 풀었다고 홍보하는 모습이 반복됐다”며 “오히려 부처들이 새로운 산업에 대해 통제를 강화하고 주도권을 가지려는 행태를 보였다”고 말했다.


○ 아무리 대통령이 외쳐도 규제 두 배 이상 증가

1993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을 질타하며 행정개혁쇄신위원회를 만든 이후 규제 혁파는 정권마다 주요 국정 과제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프랑스 혁명의 기요틴(단두대)처럼 규제를 철폐하겠다”고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덩어리 규제를 집중적으로 개선하겠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는 ‘규제 전봇대를 뽑겠다’고 했고, 박근혜 정부는 ‘손톱 밑 가시를 빼겠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 역시 ‘붉은 깃발을 치워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의 신산업은 규제에 발목이 잡혀 있다. 역대 대통령들이 규제 개혁을 강조했지만 20년간 등록 규제 건수는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규제개혁위원회가 집계한 한국의 등록 규제 수는 2000년 6912건에서 2009년 1만2905건으로 증가했다. 2015년에는 1만4608건에 달했다. 이후로는 정부가 양적 개혁이 아닌 질적 개혁을 추진한다는 이유로 규제정보포털에 아예 등록 규제 건수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대통령들이 규제 개혁 최전선에 섰음에도 전 세계와 비교한 규제지수는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해 10월 세계경제포럼(WEF)이 평가한 국가경쟁력평가에서 한국의 정부 규제 지수는 138개국 중 79위로 규제가 강한 나라로 분류됐다. 지난 정부 초기와 말기를 비교하면 박근혜 정부는 ‘2013년 79위→2016년 105위’, 이명박 정부는 ‘2009년 98위→2012년 114위’로 순위가 떨어졌다. 대통령의 힘이 줄어드는 임기 막바지로 갈수록 규제가 더 강해졌다는 것이다.


○ 대통령 5명이 말해도 원격진료 규제 못 풀어

대통령의 거듭된 지시에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 대표적 규제 중 하나가 원격진료다. 지난해 8월 문재인 대통령은 여야 원내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도서벽지에 있어 의료 혜택을 받기 어려운 환자들을 원격의료 하는 것은 선(善)한 기능”이라며 “순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에서 원격진료도 가능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대통령의 인식은 이미 19년 전에 시작됐다. 김대중 정부는 2000년 ‘지식정보화 사회 구현을 위한 규제 개혁’ 과제 중 하나로 원격진료 도입을 추진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고령화사회 대비 및 신(新)소프트웨어(SW) 시장 육성 방안으로 추진했다.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도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대통령 지시→유관 부처 검토 및 태스크포스(TF) 구성→시범사업→반발→시간 벌기→정권 교체’의 흐름을 누구도 뚫지 못했다.

정보기술(IT) 선진국 가운데 원격진료를 금지하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일본은 2015년 원격의료를 전면 시행했고, 독일도 지난해 원격의료 금지를 폐지했다. 미국은 전체 진료 6건 중 1건이 원격으로 이뤄지고 있다. 신산업 도입 속도가 느리다고 평가받는 프랑스도 지난해 9월 원격진료에도 건강보험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가 미적대는 사이 피해는 고스란히 시장에 돌아가고 있다. 김민준 H3시스템 대표는 2003년 원격 환자 모니터링 서비스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원격진료 규제 때문에 회사의 매출은 대부분 미국에서 나온다. 김 대표는 “공무원들이 말로는 규제 완화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규제를 완화하는 데 일종의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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