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변호사역 아빠, 흑인 간호사역 아들

김기윤 기자

입력 2021-11-26 03:00 수정 2021-11-26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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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엔젤스 인 아메리카’
박지일-박용우 父子 한 무대에
내달 26일까지 명동예술극장


19일 서울 용산구 국립극단에서 만난 배우 박지일(왼쪽)과 박용우. 박지일은 “배우 대 배우로 한 공간에서 연습하다 문득 눈이 마주치면 꼭 사내 연애하는 기분”이라며 웃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26일 개막하는 국립극단 신작 ‘엔젤스 인 아메리카―파트 원: 밀레니엄이 다가온다’에는 독특한 인연의 두 배우가 한 무대에 선다. 권력욕에 눈이 먼 변호사이자 극우 백인 보수주의자인 ‘로이’ 역의 박지일(61)과 드래그퀸(과장된 여성성을 연기하는 여장 남자)이자 흑인 간호사로 에이즈 환자를 돌보는 ‘벨리즈’ 역의 박용우(32)다. 극단에 선 두 캐릭터를 연기하는 이들은 부자(父子) 관계. 71년 역사의 국립극단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한 무대에 오르는 건 처음이다. 연습실에서 두 배우가 서로 내색을 하지 않아 이들의 관계를 몰랐던 동료가 많았단다.

19일 서울 용산구 국립극단에서 인터뷰한 두 배우는 “이번 작품을 하기 전에는 각자 작품 활동에 지장을 줄까 봐 코로나19에 상대적으로 안전한 야외에서 만나 안부를 전했다. 이 작품 덕에 요즘 연습실에서 매일 가족을 만나 즐겁다”며 웃었다. 2003년 연극 ‘서안화차’로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수상한 박지일은 연극을 비롯해 드라마 ‘날아라 개천용’,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선 굵은 연기를 선보였다. 박용우는 현재 국립극단 시즌단원으로 활약하며 호평을 받고 있다.

이번 작품은 극작가 토니 쿠슈너의 대표작으로 1991년 미국에서 초연됐다.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 시절 반(反)동성애 사회 분위기에서 심리적 압박과 멸시를 버틴 동성애자들의 삶을 은유적 서사로 풀어냈다. 초연 당시 퓰리처상과 토니상을 휩쓸었다. 지난해 동아연극상 작품상, 연출상을 수상한 신유청 연출가가 한국 초연을 맡았고, 배우 정경호는 이번 작품으로 연극에 처음 도전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 공연을 따라다니던 박용우는 고교 3학년 때 아버지에게 배우가 되겠다고 고백했다. 아버지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며 이후 연기 스승을 자처했다. 박용우는 “순간적 충동에 의지해 연기하면 안 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늘 가슴에 새긴다”고 말했다.

공연이 임박한 요즘 두 사람은 자신의 캐릭터에 몰입하느라 서로에게 큰 관심을 쏟지는 못한다.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서만 간단히 조언할 뿐. 소수자를 탄압하고 죄의식조차 없는 악인을 연기하는 박지일은 “가장 정이 안 가는 캐릭터다. 그런 인간마저 따뜻하게 바라봐야 한다는 데 작품의 메시지가 담겼다”고 설명했다.

박용우는 한 번쯤 꼭 해보고 싶었던 드래그퀸 역할을 맡았다며 기뻐했다.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 얼굴을 검게 태우고 머리는 밝게 염색했다. 그는 “남성 중심, 이성애 중심의 서사가 대부분이다. 고정관념을 깰 작품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했다. 극중 상대편을 끌어안는 간호사를 연기하기 위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관용을 표현하려 고민한다”고 덧붙였다.

다음 달 26일까지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 3만∼6만 원. 19세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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