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대서 만나는 100人 100色 ‘서울 이야기’

김기윤 기자

입력 2021-09-06 03:00 수정 2021-09-06 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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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천만 개의 도시’ 박해성 연출가
1년간 시민 20여명 인터뷰 일상 재조립
주인공-서사 없이 각자의 순간 보여줘
“서울의 모습, 끊임없이 의심하며 고민”


박해성 연출가는 “연극의 미덕은 허무함이다. 매번 새롭게 시작해 끝나면 소멸하는 허무한 작업인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연출가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관객이 직접 가치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울 뿐”이라고 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서울이란 도시는 어떤 질감, 빛깔, 냄새를 갖고 있을까. 대체로 비슷한 이미지를 그릴지 모르지만, 깊게 파고들면 각 장면은 조금씩 다를 가능성이 크다. 같은 공간에도 각자의 인생, 경험, 시선이 다르게 녹아 있기 때문.

모두의 삶 속에 녹아든 서울의 모습을 다양하고 구체적 모습으로 시각화한 작품이 무대에 오른다. 연극 ‘천만 개의 도시’가 19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관객과 만난다. 심오하면서도 거대한 이 작업을 맡은 건 박해성 연출가(45). 최근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그는 “형식, 접근 방법이 어떻든 자유도가 큰 작품이었다. 서울을 배경으로 역사적 사건을 다루거나 도시를 상징화한 작품은 그간 많았다. 대신 완전히 반대로 접근하기로 했다”며 기획 취지를 설명했다.

연극 ‘천만 개의 도시’는 벤치에 앉은 두 배우가 대화하는 모습이 무대 중앙에서 비춰지는 동시에 여러 인물, 상황이 무대 곳곳에서 재현된다. 서울시극단 제공
작품은 여느 연극과 사뭇 다르다. 주인공 중심의 일정한 서사가 없다. 대신 시민들의 다양한 일상을 담은 47개의 장면으로 잘게 쪼개져 있다. 100여 개의 캐릭터 중엔 장애인, 외국인 그리고 동물도 있다. 각 장면 속 인물들은 시간 순이나 서사를 따르는 대신 동시다발적으로 발화하고 연기한다. 때문에 작품은 모자이크 같기도 하고, 최근 유행하는 ‘쇼트폼(짧은 형식)’ 콘텐츠를 무대화한 느낌도 든다. 전 과정은 배리어프리(barrier free·장애인 친화적)로 진행된다.

“각자의 서울이 다른데 대표적 이미지로만 모으려면 누군가의 개별성을 희생해야 하잖아요. 서울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이 순간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이 공존하는 무대를 떠올렸습니다.”

작업 방식도 독특했다. 1년에 걸친 사전 준비작업 중 박 연출가는 전성현 작가와 함께 시민 20여 명을 인터뷰했다. 그는 “시민들의 인생 이야기보다는 사소한 일상, 순간들에 대해 얘기했다. 인터뷰에 등장한 공간, 인물, 사연을 분할하고 해체한 뒤 재조립해 새로운 장면과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했다. 또 “47개의 장면을 한 작품에 담는 게 큰 도전이었다. 이런 형식이 익숙하지 않은 배우들에게도 연기는 큰 숙제였을 것”이라며 웃었다. 관객들에게도 작품은 도전해 볼 만한 숙제다. 3일 공연을 본 한 관객은 “서사가 없어 당황했지만 마치 사람이 많이 다니는 광장에서 사람 구경하며 멍 때리는 것 같은 색다른 체험”이라고 털어놨다. 박 연출가는 “작품을 연출하면서 추출해낸 키워드 중에도 일상과 다른 순간으로 ‘몰입’ ‘멍 때림’ 등이 있었다”고 했다.

연극적 근본주의를 견지한다는 평가를 받는 박 연출가는 지난해 김상열 연극상을 수상했다. 앞서 ‘스푸트니크’ ‘믿음의 기원2: 후쿠시마의 바람’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 ‘코리올라너스’ 등을 선보였다. 공대생이었던 그는 우연히 학내 극회에 발을 들였다 연극에 빠졌다. “창작자가 될 거란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지만 “거대한 사상과 이론도 가장 사소하고 별것 아닌 이야기로 풀어내는 연극에 끌렸다”고 털어놨다. 이번 작품에서도 박 연출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서울’의 모습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고뇌했단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생각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며 고민해 보려 합니다.” 2만5000∼5만5000원. 14세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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