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과 미술 사이… 분장한 배우 그림, 갤러리서 한바탕 놀다

김기윤 기자

입력 2021-03-22 03:00 수정 2021-03-22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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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분장’ 외길 이동민, 분장화展
연극 3편 속 배우 그림 22점 선보여
분장화 주제 전시회는 국내 처음
“낯선 길 열어가는 긴 여정의 시작”


이동민 디자이너는 “현대극 분장은 한국이 세계적 수준이다. 입체적 얼굴보다는 밋밋하면서 다소 큰 얼굴이 분장하기에 좋다”고 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이것은 연극인가, 미술인가.

분장(扮裝)을 마치고 한바탕 무대를 놀던 배우들이 전시관에 그림으로 섰다. 공연 중 한 장면을 촬영해 빼다박은 듯, 조명 각도마다 달라지는 배우의 빛깔을 담아냈다. 무대 위 배우들의 숨결을 머금은 그림들이 생명력을 뿜어낸다.

분장을 회화(繪畵)로 변신시킨 주인공은 분장 디자이너 이동민(59). 한국 연극계에서 그를 빼고는 분장을 논하기 어렵다. 1986년부터 지금껏 35년간 오로지 분장 디자이너로 활약한 그가 26일부터 31일까지 서울 종로구 혜화아트센터에서 ‘이동민 분장畵 전시회’를 연다. 분장화를 주제로 한 전시는 국내 처음이다. 19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만난 그는 “화가로서는 이번 전시회가 데뷔 무대나 마찬가지다. 분장화라는 낯선 길을 열어가는, 조심스럽고 긴 여정의 첫걸음”이라고 했다.

이동민 디자이너 제공

연극을 중심으로 영화, 뮤지컬, 오페라까지 평생 300여 작품의 분장을 도맡았던 그는 이번 전시에서 연극 세 편 속 분장화 22점을 추렸다. 우선 제52회 동아연극상 대상을 수상한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모든 인물을 그린 16점, 연극 ‘봄날’의 배우를 그린 3점이 전시된다. ‘조씨고아…’는 조씨 가문이 멸족되는 재앙 속에서 마지막 핏줄을 살리려는 노력과 복수를 그렸다. ‘봄날’은 권력, 재물 등 모든 걸 가지려는 아버지와 착취당하는 아들들을 그린 작품으로, 1984년 초연 때부터 아버지 역을 맡은 배우 오현경(85)의 대표작이다.

“작품이 잘 나와야 분장도 잘 산다”는 이 씨의 지론에 따라 분장의 맛이 잘 살아있는 작품을 골랐다. 아직 공연을 올리지 않은 연극 ‘오셀로’ 속 인물에 그의 독자적 해석을 입힌 3점도 그렸다. 이른바 ‘콘셉트 분장화’다. 그는 “모든 배우에게 초상권 허락을 받긴 했는데…. 분장하고 다르게 제 그림까지 썩 좋아할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그는 “제 손을 거친 뒤 무대에 오른 배우들을 떠올리거나 공연 사진을 보면서 캐릭터의 감정을 표현하려 했다. 반면 콘셉트 분장화의 배우들은 얼굴 근육, 감정을 최소한으로 그렸다”고 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선 굵은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은 대체로 그의 그림에서 진한 색감과 강한 명암 대비로 표현됐다.

평생 배우의 입체적 얼굴을 도화지 삼아 숨결을 불어넣던 그가 평면적 그림으로 눈을 돌린 이유는 뭘까.

“분장의 해석은 결국 연출자의 큰 구도에 맞춰야 하는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오직 분장의 관점에서 그림을 표현해 보고 싶었죠. 연극과 미술이 만나는 제3의 지대에서 새 장르가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요?”

2018년부터 구상한 전시는 큰 진통을 겪었다. 틈틈이 스승들을 찾아다니고 화실에서 공부하며 차곡차곡 그림을 그려뒀는데 지난해 이사 과정에서 19점을 도난당했다. 때문에 전시회에는 새로 그린 그림이 더 많다. “다시 그리면서 표현이 좋아졌다”지만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었다.

원로 연출가인 이원경(1916∼2010)의 딸로 어려서부터 극장과 분장실에서 자란 그는 “연출을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는 척하며 평생 분장에만 심취했다. 일본 유학도 다녀왔다. 딱히 왜 빠져들었는지 스스로도 이유를 찾기 힘들다. 그의 고집에 아버지도 나중엔 내버려뒀다고 한다. 분장실은 걷기 시작할 때부터 매일 찾던 생활 터전이었던 셈이다.

누가 분장이 뭐냐 물으면 그는 “텍스트 속 인물을 해석하고 배우를 캔버스 삼아 육화(肉化)하는 작업”이라고 답한다. 이번 전시는 인물을 육화하던 그의 손이 빚은 새로운 극이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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