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폭탄’은 옛말…‘과거와 다른 요즘 노인들’이 새로운 시장 만든다?

고령화에는 늘 ‘시한폭탄’ ‘재앙’ 같은 부정적인 단어가 뒤따른다. 하지만 고령화를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로 보는 이들도 있다. 20년 전 미국 메사추세츠공대(MIT)에서 문을 연 에이지랩(Age Lab)도 그런 곳이다. 이 연구소의 설립자이자 ‘장수경제(longevity economy)’의 창시자인 조셉 코글린 교수는 “과거와 다른 요즘 노인들”이 새로운 시장을 만들 수 있다는 데 주목한다.

“인류 역사에서 이렇게 많은, 고학력의, 자본력을 갖춘 노인이 출현한 적이 있나요? 요즘 미국 시장 구매력의 70%가 50세 이상 인구의 지갑에서 나옵니다.”(코글린 교수)

미국 보스턴 MIT 캠퍼스 내에 위치한 에이지랩은 1999년 “새로운 노년층을 위한 기술”을 연구하기 위해 세워졌다. 이곳의 30여 명의 연구원들은 컴퓨터공학이나 산업공학, 인지과학 등 이공계 전공자부터 정책, 사회복지, 심리학 사회과학 전공자들까지 다양한 분야에 포진돼 있다. 공통점은 달라진 요즘 노인들의 욕구에 관심이 많다는 것. 고학력에 트렌드에 민감하며, 디지털에 익숙한 스마트 시니어는 이들의 주요 관심사다. 이들은 이 같은 연구를 토대로 노인과 고령화에 대해 이해를 높이고 싶어 하는 기업들을 자문한다.

지난 5월 말 기자가 에이지랩을 찾았던 날에는 미국 보험사 하트포드를 포함해 보험 및 금융사 직원 10여 명의 연구실 투어가 한창이었다. 연구실 중앙 세미나 룸을 꽉 채우고, 복도까지 늘어선 이들은 에이지랩의 연구 프로젝트 중 하나인 ‘노인의 대중교통 이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연구원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에이지랩 문 두드리는 글로벌 기업들

에이지랩에는 이처럼 매주 2~3곳의 기업 관계자들이 찾는다. 독일 자동차회사 다임러 벤츠와 전자전기 회사 지멘스, 미국 약국체인 CVS, 스포츠용품 브랜드 뉴발란스, 음료회사 펩시…. 이름만 대면 알 법한 글로벌 기업들 모두 ‘한 수 배우겠다’며 에이지랩을 찾았다. 방문 기업들은 단순 조언을 얻는데 그치지 않고, 일부는 컨소시엄을 구성해 에이지랩과 공동 연구를 진행하기도 한다.

2005년 개발한 ‘아그네스(AGNES)’는 에이지랩을 대표하는 도구. 영문으로 ‘Age Gain Now Empathy System(노인에 공감할 수 있는 노화 체험 시스템)’의 약자인 아그네스는 전문 물리치료사 등의 자문을 바탕으로 70대 후반의 노인이 경험하는 노화와 만성질환에 따른 불편함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됐다.

아그네스 개발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회사는 다임러 벤츠와 지멘스다. 이들 회사들은 자신들의 주 고객이 나이가 들자, 노년층을 이해하기 위해 에이지랩에 자문을 구했다. 엔지니어, 디자이너, 마케터 등 다양한 집단들이 노인에 대한 공감대를 갖게 하기 위해서는 설문조사나 인터뷰 이상의 것이 필요했고, 체험 도구인 아그네스가 개발됐다.


●“입으면 70대가 된다” 노인 공감 위해 개발 된 ‘아그네스’

에이지랩의 사만다 브래디 연구원은 “아그네스를 입으면 누구든 70대 노인이 된다”고 했다. 그 말에 기자 역시 아그네스를 착용해봤다. 방탄조끼처럼 생긴 약 4.5kg짜리 조끼부터 입었다. 양 팔다리와 손·발목 등에 총 10개의 모래주머니를 찼다. 이어 목과 팔꿈치, 무릎을 두꺼운 패드로 조였다. 근력이 손실된 느낌과 관절 퇴화를 느끼기 위해서라고 했다.

머리에 쓴 헬멧은 어깨의 줄과 연결됐다. 당장 뒷목을 잡고 싶을 만큼 피로했지만, 그 조차 힘들었다. 팔목과 발목에도 각각 허리부분으로 줄이 연결돼 손을 뻗기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발에는 밑창의 높이가 일정치 않아 균형을 잡기 어려운 슬리퍼를 신었다. 브래디 연구원은 “노화로 신경이 둔해지면 지표면에 발이 닿는 느낌이 균일하게 전달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손가락 관절퇴화와 촉각 둔화를 체험하기 위한 장갑을 신고 마지막으로 고글을 써야했다. 당뇨합병증 등 각종 질환을 가정한 다양한 버전의 고글 중에서 기자는 비교적 무난해 보이는 고글을 골랐다. 녹내장으로 시신경 손상을 가정한 고글이었다. 시야가 현저히 좁아지고 바깥 풍경이 뿌옇게 보였다.

그래도 ‘내 몸은 20대’라는 생각에 발걸음을 뗐지만 아그네스의 성능은 꽤 우수했다. 목이 자연스레 굽었다. 길을 걷다 벽에 붙은 포스터를 보려고 고개를 돌리는데 쉽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고 포스터를 뚫어질 듯 보니 겨우 한 글자씩 눈에 들어왔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노인 이해를 높이자 제품이 달라져”

다임러 벤츠, 지멘스의 직원들은 아그네스를 입고 차에 시승하거나 자신들의 제품을 사용해보는 것은 물론, 동작 게임과 레고 조립 등을 했다. 이후 다임러는 차에 타고 내릴 때 허리를 덜 숙일 수 있도록 구조를 바꿨다. 전자제품의 작은 버튼 때문에 계속 잘못된 버튼을 누르는 ‘간단한 좌절’을 경험한 후 지멘스의 직원들은 제품의 버튼 배치를 바꿨다.

최근에는 시리얼 및 식품 제조사 제너럴 밀스의 직원들도 아그네스를 입었다. 이들의 미션은 ‘아그네스 입고 컵케이크 만들기’. MIT 캠퍼스 맞은편 식료품점에서 선반 꼭대기에 있는 컵케이크 재료를 사온 후, 침침한 눈으로 포장 박스에 깨알 같은 글자로 쓰인 조리법을 읽어가며 컵케이크를 만들었다. 이 체험 직후 제너럴 밀스는 자사 시리얼 박스에 있는 글자의 크기를 확대했다. 또 이 같은 체험 이후 미 약국체인 CVS는 매장 복도의 너비를 비롯해, 선반 진열 방식 등을 바꿨다.

아그네스가 체험을 통해 노인을 이해하려는 시도라면, 에이지랩에서는 ‘85+라이프스타일 패널’을 운영하며 실제 노인을 만나는 작업도 진행한다. MIT 주변에 사는 85세 이상의 노인들은 두 달에 한번씩 에이지랩에 방문해 상품 디자인이나 최신 기술에 대한 조언부터, 건강, 재정문제, 삶의 의미 등 다양한 노년 삶의 이슈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눈다. 연구소 측은 이들을 통해 노년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산업적인 조언도 확장할 수 있다. 기자가 만난 패널 중 한 명인 밥 홀릭(92)씨는 “다음 세션 주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레시피’로 정했다. 영양에 대해 토론한다고 한다. 나는 수프 레시피 가져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패널로 참여하는 노인들은 사회 참여에 보람을 느낀다. 또다른 패널 에드가 클루먼(94) 씨는 이곳의 참여 경험을 “좋은 여행을 하는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노인도 편한, 모두를 위한 기술과 디자인

에이지랩에서 요즘 가장 관심을 쏟고 있는 연구과제는 ‘스마트 리빙’이다. 사물인터넷(IoT), 공유서비스 등 이미 무르익은 기술들을 활용한다면 노인들도 요양원에 가지 않고 마지막까지 내 집에서 말년을 보낼 수 있다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여러 세대가 함께 일할 수 있는 회사에 대한 연구도 추진 중이다. 평균수명이 늘면서 과거보다 더 오래 일해야 하는 만큼 10대 인턴부터 80대 고령자까지 함께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직장의 모습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는 과정이다. 자율주행차나 인공지능(AI)처럼 신기술과 노인의 삶을 함께 아우르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다만 에이지랩은 노인을 위한 시장‘을 위해 노인을 젊은 세대와 다른 특별한 집단으로 구분 짓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에이지랩의 한국인 연구원인 이채우 씨는 “노인 만 편한 것이 아니라 노인도 편한 것이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코글린 교수 역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노인의 라이프스타일은 미래에 ’노인‘이 될 지금 젊은세대가 동경하는 형태가 돼야 한다”면서 “모든 연령대 사람들이 사회에 참여하고 사회의 생산성 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전연령 친화적(age-friendly)‘인 사회가 결국 노인에게도 좋은 사회”라고 말했다.

보스톤=임보미기자 b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