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없는 화이트칼라보다 손기술의 명장 꿈꾸는 청년들

동아일보

입력 2013-05-13 03:00:00 수정 2013-05-13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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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부장 달고 끝… 차라리 ‘영 마이스터’ 도전”

건국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이정훈 씨의 꿈은 죽을 때까지 자전거를 만드는 것이다. 고객과 자전거에 대해 얘기하고, 고객이 평생 탈 수 있는 자전거를 만드는 게 즐겁다. 그의 자전거 공방 ‘루키 바이크’에는 작업 중인 설계도와 부품, 완성된 자전거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주문이 두 개 밀려 있어 바쁘다는 이 씨는 “장인이 될 때까지 많이 배우고 경험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8일 경기 구리시 교문동의 한 지하 작업실. 흡사 차고처럼 사방이 막혀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이곳은 이정훈 씨(26)가 운영하는 자전거 공방 ‘루키 바이크’이다. 이 씨는 손으로 자전거를 제작하는 이른바 ‘프레임 빌더’다. 자전거의 뼈대가 되는 프레임을 고객의 신체 사이즈에 맞게 설계한 뒤 직접 사포질하고 용접해 만든다. 만든 자전거마다 자신의 브랜드인 ‘루키(Rookey·루키와 키의 합성어)’가 적혀 있다. 신인이라는 뜻의 ‘루키(Rookie)’와 고객이 원하는 자전거를 만드는 ‘열쇠(key)’가 되겠다는 의미로 브랜드 이름을 지었다.

“이건 주문한 고객의 별명을 프레임에 써 넣은 ‘랜도너(여행용 자전거)’인데 평생 쓸 자전거라고 합니다.”

공방에 놓인 자전거를 가리키며 설명할 때 이 씨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건국대 토목공학과에 입학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군 제대 후 자전거를 만나면서 평생 할 일을 찾았다. 이 씨는 “단 한 대라도 고객이 평생 쓸 수 있는 자전거를 만드는 게 꿈”이라며 “경험을 이기는 기술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나도 20년 후에는 ‘장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웃었다.

최근 이 씨처럼 ‘손으로 하는 일’에 매료돼 장인을 꿈꾸는 젊은층이 늘고 있다. 기업에 취업하는 대신 작은 작업실에서 전통 방식으로 소량 생산하는 수공업을 선택하는 것이다. 뚜렷한 비전이 보이지 않는 ‘화이트칼라’보다 평생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장인이 낫다는 판단에서다.

서울시 청년창업지원센터 조성식 주무관은 “최근 가방이나 가구 등 전통 제조업 관련 창업이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사업과 같은 정보기술(IT) 분야 창업과 비슷한 수준으로 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서울 시내에 젊은이들이 운영하는 가죽 공방도 최근 5년 새 급증해 현재 30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 적성 찾아 맨땅에 헤딩

서울 강남구 청담동 골목에 위치한 윤형원 씨의 작은 공방은 각종 기계와 아기자기한 판매대 때문에 발 디딜 틈이 없다. 서강대 철학과를 졸업한 윤 씨는 초콜릿에 ‘철학’을 담아 만든다. 에콰도르, 페루, 가나에서 카카오원두를 수입해 정성껏 볶고, 좋은 냄새만 잡아서 원산지별로 초콜릿의 개성을 살린다. 윤 씨는 “내일은 더 맛있는 초콜릿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수제 초콜릿 공방 ‘쇼콜라 오브제’에서 만든 초콜릿은 특이하다. 포장지에는 ‘제조자가 쓴 편지’가 영어로 적혀 있다. 원재료는 카카오 원두와 백설탕, 단 두 가지뿐이다. 일반적으로 시중에서 파는 초콜릿 제품은 초콜릿 완제품을 들여와 재가공해 판매한다. 반면 이곳에선 카카오 원두를 직접 수입해 재료로 쓴다. 카카오의 껍질을 까서 볶고, 나쁜 냄새는 날려 보내고, 설탕을 넣어 사각형 모양의 초콜릿 바를 만든다. ‘식품제조업’으로 등록했지만 직원은 사장인 윤형원 씨(31)와 디자이너뿐이다.

윤 씨는 “와인이나 커피처럼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도 농작물이기 때문에 원산지와 수확된 해의 날씨에 따라 풍미가 제각각”이라며 “초콜릿도 땅에서 나는 음식이기 때문에 그 개성을 살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서강대 철학과를 나온 그는 사회학 석사 과정에 다니다 2010년 초콜릿 공방을 열었다. 2011년 우연히 초콜릿 관련 세미나에서 빈투바 초콜릿에 대해 알게 되면서 ‘이거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딱히 배울 곳이 없어 스스로 연구해야 했다. 카카오 원두 수입처를 찾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작업 과정을 설계하기 위해 해외 판매자들과 주고받은 e메일만 1000통이 넘는다. 농기계 ‘풍구’를 개조해 써보기도 했다.

서울 용산구 청파동에서 가죽 공방 ‘끌로르’를 운영하는 권백규 씨(32)와 박재형 씨(28)도 ‘맨땅에 헤딩’ 하는 식으로 가죽 공예를 배웠다. 각각 명지대 영문과와 홍익대 경영학과를 나온 이들은 우연히 가죽 공예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2011년 함께 공방을 열었다. 한국에서 가죽 공예를 배우려면 공장에 들어가는 것 외에는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필요한 도구는 해외에서 어렵게 구하거나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들었다.

권 씨는 “한국에선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직업학교를 찾기 어렵고 훌륭한 장인들과 젊은 세대와의 교류는 사실상 단절돼 있다”며 “알음알음으로 가죽공방을 찾아 배우고 자꾸 만들어 보면서 기술을 익혔다”고 말했다.


○ “대학 꼭 가야 하나, 죽을 때까지 AS”

서울 용산구 청파동 가죽공방 ‘끌로르’를 운영하는 권백규 씨는 고객들이 원가뿐 아니라 시간에 대한 가치를 더 알아주길 기대한다. 명지대 영문학과를 나온 그는 “좋은 가죽으로 한 땀 한 땀 실로 바느질하는 전 과정의 가치를 몰라주는 사람이 많다”며 “아직 장인이 되려면 멀었지만 즐겁게 하다 보면 더 나은 실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여기 아직도 안 망했네?”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1시까지 공방에서 조용히 가방을 만들다 보면 행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럴 때마다 권 씨와 박 씨는 피식 웃는다. 여전히 정성껏 손으로 만든 제품과 그 직업에 대한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시각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권 씨는 “안정적인 직장에 취업해서 사는 것도 좋지만 그들 상당수는 과장, 부장으로 끝인 ‘시한부 인생’인 것 같다”며 “우리는 단순하게 오늘은 손가방을, 내일은 서류가방을 만들겠다는 고민만 하면 된다. 시간이 흐르면 더 잘하는 사람이 되고, 언젠가 장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재봉틀을 쓰지 않고 한 땀 한 땀 손으로 바느질한다. 주문 들어온 제품을 만드는 데 온 정신을 쏟느라 예비군 훈련을 빼먹어 벌금을 낸 적도 있다. 한 장에 원가가 45만 원인 고급 가죽으로 제품을 만드는데 정성 들여 만들다 납기일을 넘겨 오히려 손해가 날 때도 있다. 권 씨는 “고객들이 제품을 잘 쓰고 있는지 궁금하다”며 “100년쯤 된 가방회사들은 자신이 만든 가방이 100년 후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부럽다. 내가 만든 가방은 죽을 때까지 애프터서비스(AS)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루키 바이크의 이 씨도 소중한 고객들이 하나하나 기억에 남는다. 그중에는 이탈리아에 맡길 것을 고민하다 이 씨에게 맡긴 고객도 있다. 아직 ‘초짜’지만 영업비밀일 수도 있는 작업일기를 상세하게 인터넷에 올리며 고객과 소통하고, 배우면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를 보이자 선뜻 그를 믿고 맡긴 것이다.

이 씨는 “어릴 때에는 검은색 승용차를 타고 서류가방을 든 사람들이 멋있어 보였고 그래서 대학에 갔지만 등록금을 내는 대신 차라리 그 돈으로 자전거에 대한 기술을 더 연마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며 “사촌동생들에게도 굳이 대학에 가야 하는지 생각해 보라고 얘기한다”고 말했다.

쇼콜라 오브제의 윤 씨는 “공방을 열고 생활하는 게 쉽진 않지만 오늘보다 더 나은 초콜릿을 만들겠다는 꿈이 있어 좋다”고 말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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