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주총 파워’ 현실로… ‘권력 입김 배제’ 신뢰 확보가 숙제

이건혁 기자 , 김지현 기자 , 장윤정 기자

입력 2019-03-28 03:00 수정 2019-03-28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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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호 대한항공 이사 연임안 부결]


국민연금의 반대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대한항공 대표이사직을 내려놓게 되면서 국민연금이 주도하는 주주 행동주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국민연금이 앞으로도 기업의 의사 결정에 적극 개입할 것으로 보이고 정치권과 시민단체도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적극 주문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재계의 긴장감은 커지고 있다.


○ ‘주총 거수기’ 딱지 뗀 국민연금

국민연금은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주식 108조9000억 원어치를 갖고 있으면서도 주주로서 존재감이 거의 없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경영진의 안건에 대부분 찬성표로 일관해 ‘주총 거수기’라는 비판을 받거나, 간혹 반대표를 행사하더라도 판세를 바꾸는 데 실패해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들었다. 실제로 국민연금이 공시한 올해 의결권 행사 내용에 따르면 26일까지 109개 기업의 주총 안건 중 122개에 대해 반대표를 행사했으나 15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원안대로 통과됐다.

하지만 이번에 국민연금 주도로 대기업 총수의 이사직을 박탈하는 첫 사례가 나옴에 따라 앞으로는 국민연금의 영향력에 힘이 크게 실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7월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 지침) 도입을 발표한 뒤 본격적인 주주권 강화에 나서면서 ‘저배당 기업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등 기업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특히 국민연금이 조 회장의 대한항공 이사 연임에 반대하고 이것이 실제로 주총에서 현실화된 것은 국민연금 주주권 강화의 정점을 찍는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 방향을 미리 공개하고 외국인과 기관, 소액주주가 여기에 가세하는 모양새를 보였다는 점도 주목을 받고 있다. 대한항공의 경우처럼 오너 일가가 연이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기업은 주주들이 자발적으로 결집해 최고경영자를 끌어내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 더 중요해진 국민연금 독립성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의 주주권 강화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본다. 이찬우 국민대 특임교수(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는 “캐나다 연금투자위원회(CPPIB), 미국 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CalPERS) 등 주요 연기금들이 의결권을 적극 행사해 보유한 지분 가치를 높이는 추세여서 국민연금도 같은 전략을 쓰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문제는 국민의 노후자금을 굴리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가 아직까지 권력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국민연금은 1월 문재인 대통령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적극 행사하라고 주문하자 불과 며칠 뒤에 한진칼에 대한 주주권을 행사하기로 결정하는 등 의사 결정 과정에서 정부의 영향을 받는 듯한 모습을 보여 왔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세계 주요 연기금 중 의사결정기구의 장(長)이 행정부 관료(보건복지부 장관)인 건 국민연금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재계는 정권 등 특정 세력의 주문에 따라 국민연금이 기업 경영에 간섭하는 ‘연금 사회주의’가 현실화되고 있다고 우려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이날 입장 자료를 통해 “국민연금이 민간 기업의 경영권을 좌지우지하게 된다는 우려가 있는 만큼 신중했어야 했다”며 유감을 표시했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민연금의 결정에 기업의 가치와 미래에 대한 고민이 충분히 담겨 있지 않기 때문에 결국 정권과 연결돼 있다는 비판이 계속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국회에서도 국민연금의 결정과 주총 결과를 놓고 공방이 벌어졌다. 여당 의원들은 “주주 행동주의로 회사 가치가 극대화되고 주주 이익이 제고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주장한 반면 야당 의원들은 “도덕적 기준으로 경영권을 뺏긴 사건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원리가 침해됐다”고 맞섰다.

국민연금의 이번 결정이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향후 대한항공의 주가와 실적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시각이 많다. 이날 유가증권시장에서 대한항공 주가는 조 회장 연임 부결 소식이 전해진 뒤 5% 넘게 뛰어올랐으나 이후 상승폭을 줄이며 전날보다 2.47% 오른 3만3200원에 거래를 마쳤다. 한진그룹 지주사인 한진칼은 0.39% 올랐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당장은 조 회장 퇴진으로 주가가 오를 수 있지만 향후 경영권 문제로 회사가 흔들릴 경우 오히려 기업 가치에 악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했다.

이건혁 gun@donga.com·김지현·장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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