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배극인]기댈 곳 없는 한국 기업들

배극인 산업부장

입력 2017-09-16 03:00 수정 2017-09-1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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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극인 산업부장
롯데가 한국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하면서다. 박정희 정권의 요청에 따른 것인데 사연이 있다. 박정희 정권이 출범한 1961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였다. 기술도 없었고 투자하려 해도 돈을 빌려주는 나라가 없었다. 국가 신용이 없던 때였다. 박 정권은 재일교포 사회를 선진 기술과 돈을 들여올 통로로 주목했다. 1965년 일본과의 국교 수립이 기회였다. 1967년 한국 첫 수출산업공업단지로 조성한 구로공단 입주기업 28곳 중 18곳이 재일교포 투자기업이었다.

박 정권은 신격호 총괄회장에게는 당초 종합제철소 건설을 부탁했다. 신 회장은 일본 제철기업의 도움을 받으며 설계도면까지 만들었다. 중간에 박 정권은 철강사업은 국가가 직접 한다고 방침을 바꿨다. 그 대신 롯데에는 관광 진흥을 위해 서비스산업을 발전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군말 없이 제철소 설계도를 정부에 넘긴 신 회장은 롯데제과, 롯데호텔을 잇달아 세우며 한국 식품 호텔산업 선진화에 길잡이 역할을 해왔다.

롯데는 출범 50년 만인 올해 연매출 100조 원, 국내외 임직원 18만 명의 국내 5대 그룹으로 성장했다. 협력업체까지 합치면 국내에서만 35만 명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 이런저런 비판도 있지만 공(功)은 공대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이런 롯데가 요즘 고립무원이다. 국가 안보를 위해 정부에 사드 부지를 제공한 죄로 중국 보복의 타깃이 됐다. 그런데도 롯데는 어디서도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못 듣고 있다. 엊그제는 정부가 30년 점용 허가 기간이 끝나는 서울역과 영등포역 국가 귀속 여부를 몇 년이나 끌다가 만료를 3개월 앞두고 갑자기 발표했다. 롯데백화점과 롯데마트에서 일하는 4000여 명은 대책도 없이 일자리를 잃을 판이다. 안팎으로 동네북 신세인데 비단 롯데만이 아니다. 요즘 한국 기업들은 어디 한 곳 기댈 데가 없다고 하소연한다.

며칠 전 만난 한 기업인은 “사업을 접고 싶다”고 넋두리했다. 기업을 키워놓고 보니 온갖 규제와 제재, 조사에 시달리게 됐다는 얘기였다. 다른 자리에서 만난 중견 부품·소재기업 관계자는 “공장을 증설하기로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니다”라고 했다. 반(反)기업 정서와 일부 극단적인 노조, 여기에 동조하는 정치권과 정부의 기류에 기업들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열리고 있는 정기국회에도 기업을 겨냥한 법안이 줄줄이 올라 있다. 근로시간 주 52시간 단축, 통상임금 범위 확대, 소비자 집단 소송제 등 기업들은 숨이 턱에 차오르고 있다. 매년 상식을 넘어서는 투쟁을 벌이는 어느 대기업 노조에서는 “회사가 망해도 결국 정부가 공적자금을 대줄 테니 걱정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고 한다. 기업인들로서는 맥 빠질 노릇이다.

재계에서 요즘 유행하는 말이 ‘착시 효과’다. 독보적인 반도체와 삼성전자 덕에 전체 기업의 실적이 부풀려 보일 뿐 실제 한국 경제는 대다수 산업에서 골병이 들고 있다는 것이다. 1997년 한국이 외환위기를 맞은 직접적인 계기도 반도체 착시였다.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차관 시절이던 1998년 “반도체 특수에 취해 외환위기가 닥쳐오는 것을 빨리 간파하지 못했다”고 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한국 경제 곳곳에 균열이 생기고 있는 가운데 민생 최전선에서 뛰는 기업과 기업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접은 과연 정당한 것인지 묻고 싶다.

배극인 산업부장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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