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치유하는 푸른색 풍경의 작가 이정태

이진수 기자

입력 2022-09-27 03:00 수정 2022-09-27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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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마린 블루 컬러를 주조로 풍경을 담는 이정태 작가. 홍태식 프리랜서

바다를 건너온 색이라는 의미의 파란 물감 ‘울트라마린 블루’ 컬러. 이 푸른색으로 연작을 하는 화가가 있다. 점과 선으로 풍경을 그리는 이정태(56) 작가다. 그가 삼청동에 위치한 베카 갤러리에서 올해 네 번째 개인전 ‘FLUX’를 열었다.

‘flux(플럭스)’는 끊임없는 변화라는 의미로 ‘유동’을 뜻한다. 이정태 작가는 이러한 시간의 흐름을 주제 삼아 산과 바다, 대기, 폭발하는 꽃 작업을 20여 년째 선보이고 있다. 생명이 태어나고 소멸하는 유한한 변화에 집중해 우주에서 바라보듯 먼 거리의 사물과 자연의 풍경을 그린다.

이 작가는 1991년 서울대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30여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부지런히 전시를 여는 까닭은 문학, 음악과 달리 시공간에 제약적인 미술 작업을 가능한 많이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난해 울산국제아트페어(UiAF 2021)에서 출품작 10점 모두 완판을 기록했다. 전시 오픈 일주일 전인 9월 7일 이정태 작가를 만났다. ‘FLUX’전은 9월 14일부터 10월 4일까지 열린다.


그림 시점이 대기에 떠 있는 듯합니다.

정확하게 보셨어요. 어딘가 떠 있는 상태에서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죠. (제가 그리는) 동양화와 서양 회화를 구분하는 큰 요인 중 하나가 원근법과 소실점이에요. 서양화는 르네상스 시대 이후 소실점과 원근법을 기본 베이스로 그려요. 추상 미술 분야로 오면 원근법이 해체되고 평면 회화로 가지만 대상을 두고 하는 작업에서는 원근법과 소실점이 여전히 유효해요. 쉽게 말해 서양 회화는 하나의 점을 두고 인간 중심으로 바라본 시각을 표현하고, 동양 회화는 시점을 여러 군데에 두고 그려요.


동양화를 예시로 설명하자면요.

보통 대상이 위쪽에 있죠. 임금도 북쪽에 있고요. 겸제 정선의 ‘금강전도’에서도 제일 높은 산봉우리인 비로봉이 그림 상단에 위치해요. 대상의 주인이기 때문에 가장 크게 그리는 거죠. 불교 탱화에서도 부처님은 크게, 주변 보살들은 작게 그려요. 일반인들은 더 작게 그리고요. 하나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개념이 아니라 중요한 것을 부각하는 심리적인 요인이 작용한 거죠. 마찬가지로 제 그림도 수평적인 시선에서 바라본 것이 아닌, 비행기 혹은 인공위성쯤에서 내려다봐야 보이는 형태예요. ‘천 개의 산’ 시리즈만 해도 산이 저렇게 피어 있는 꽃처럼 보이려면 인공위성에서 봐야 할 거예요.


작품이 점묘화에 가까운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점과 선의 변주로 그림을 그려요. 탱자 꽃을 모티프로 한 작업도 점 형태로, 배경은 선이죠. 물을 그린 바다 그림도 점과 선 형태이고, 달 그림에서도 달이 하나의 점처럼 보이죠. 산이 꽃처럼 느껴지는 ‘천 개의 산’ 작업도 덩어리 전체가 하나의 점처럼 보일 수 있고요.


‘시간’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군대 갔다가 대학에 복학하고 ‘시간’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생겼어요. 화병에 꽂혀 있는 꽃도 만개한 꽃과 시들어가는 꽃이 있잖아요. 시간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죠. 습작기에도 그림 안에 구체적인 대상을 드러내면서 시간성을 담곤 했고요. 그러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첫 개인전을 하면서 공허함이 들었어요. 작업에 오로지 내 생각을 담았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주변 작가나 해외 작품에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죠. (그 영향이) 그림에 드러나고요.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면서 기본부터 다시 시작했어요. 풍경 하나에 집중해서 발전시키다 보니 내가 작업에서 취해야 할 것만 찾았고, 지금의 작업이 탄생했어요. 일종의 추상화 과정을 거쳤죠.


고요하게 흐르는 시간의 풍경을 담다


FLUX / 130 X 89cm, oil on canvas, 2022.
이정태 작가의 그림은 온통 파랗다. ‘울트라마린 블루’라고 불리는 청색을 주된 색조로 작업한다. 울트라마린 블루는 과거 이탈리아의 대표 화가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심판’을 그릴 때 배경으로 썼고, 클레오파트라가 화장 재료로 사용했다고 알려진 귀한 색이다. 당시 금값만큼 비싼 안료임에도 ‘진주 귀고리 소녀’를 그린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는 푸른색 표현을 위해 항상 울트라마린 블루 컬러를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전에는 흰색과 검정색으로만 작업하셨다고요.

네. 울트라마린 블루 컬러 작업은 2005년에 시작했어요. 그 전까진 흰색과 검정색을 사용했고, 작업 방식도 점이 아닌 선긋기만 했죠. 덕분에 해당 작업들이 더욱 동양적으로 보였는지 당시 해외 공관, 외교부 등에서 작품을 소장했어요.


푸른색 중에서 왜 울트라마린 블루인가요.


청화백자에 쓰이는 색이 울트라마린 블루거든요. 그 푸른색이 그냥 끌렸어요. 전업 작가로 들어설 때 즈음 도자기에 관심이 많아서 한창 수집했죠. 조선시대 때 아라비아에서 건너온 청화라 왕실이나 고관대작들만 쓸 수 있는 색인데, 그 백자에 그려진 청화 문양과 그림이 강한 이미지로 다가왔어요.


신뢰의 의미를 지닌 색이더라고요.

심리 테라피에서 사용하는 색이에요.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준다고요. 옛날 이집트 시대부터 청금석은 소원 성취, 지적 풍요, 심리 안정을 가져다주는 귀한 보석이에요. 가톨릭 종교 회화에서 보면 성모마리아를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고요. 명상적이고 정신적인 색으로 여기죠.


‘천 개의 산’ 시리즈에서는 산이 꽃처럼 보입니다.

꽃을 형상화한 산들이죠. 여기서 ‘천’이라는 건 많다는 의미예요. 제한적인 숫자 1000이 아닌 무한의 의미를 갖고 있어요. 불가에 월인천강(月印千江)이라는 말이 있는데, 부처님 말씀을 달빛에 비유해 ‘달이 천 개의 강을 비춘다’는 뜻이에요. 한마디 말도 다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고 또 그 말이 널리 퍼진다는 거죠. 산이 꽃처럼 폭발하는 모습을 그렸어요. 사물이 풍경으로, 풍경이 사물로 보이는 듯한 흐름을 표현한 거예요.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다


어릴 적 작가는 만화를 좋아했다. 그림 자체가 좋아서다. 일곱 살 때 한글을 만화방에서 깨우쳤고 그림도 잘 그렸다. 만화에 미쳐 있던 어린 시절, 작가는 주위에서 ‘너 만화 잘 그린다. 그림 그려야겠다’는 말에 화가를 꿈꿨다. 작가는 자라는 동안 하루 일과 중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그림 그릴 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었고, 주변으로부터 받는 인정과 행복이 좋았다고. 돌고 돌아 결국 전업 작가로 전향했으나 이 길 또한 결코 쉽지 않음을 깨닫고 있다.


전업 작가 이전에 화실을 운영하셨다고요.


대학 졸업하고 12년간 예술 학교 실기 강사를 하면서 서울 강남에서 나름 알아주는 화실을 운영했어요. 다들 부러워하는 안정적인 생활이었죠. 하지만 제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어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소중한 일이지만, 그걸 위해 지금껏 그림을 그린 건 아니기에 차례대로 (역할을) 내려놨죠. 학교 먼저 그만두고, 1년 사이에 화실을 정리했어요. 주위에서는 다들 펄쩍 뛰고 걱정을 많이 했죠(웃음).


직접 경험해보니 어떠셨나요.

후회도 하고 그랬죠(웃음). 바닥까지 칠 각오 없이는 정말 힘들어요.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래도 끝까지 놓지 않고 했어요. 지금도 (전업 작가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과 앞으로도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죠.


외로운 무명의 시기를 잘 버티셨네요.

작업만 하면서 생활은 일반인들과 비슷하게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생계를 유지하고, 아이들 교육시키고 또 밖에서 인간관계도 유지하려면요. 그림이라는 게 효용성 측면에서는 굉장히 떨어져요. 가격만 보면 웬만한 차 한 대 값이긴 하지만, 선뜻 구매하기 쉽지 않잖아요. 그림만 그려 생활을 유지한다는 게 어떤 건지, 실제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에요.


그래도 이제는 아트페어 완판이라는 결과를 얻었는데요.

지금 미술시장이 좋다고 해도 우리나라 작가 90% 이상은 (외부 반응이) 무응답인 상태로 작업하고 있을 거예요. 저는 제가 주목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트페어나 전시장에서 (완판이라는) 결과는 한 번쯤 일어나는 극히 드문 일이니까요. 제가 주도해서 그렇게 만들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한두 번 일어났다고 지속적으로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 취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전시 준비할 때마다 어떤 점이 가장 신경 쓰이세요.

이전에는 전시 결과를 많이 신경 썼어요. 중요한 부분이거든요. 지금 서른세 번째 개인전인데, 최근 몇 년 사이에 그런 부담에서 많이 편안해졌어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 (갤러리에) 맡기기로 했어요. 전업 작가로 살면서 작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그걸로 생활이 되고 또 건강이 받쳐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죠.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고요.


‘플럭스’ 전시를 어떻게 살펴보면 좋을까요.

우연히 오든, 찾아서 오든 그림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구나’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한 번 더 생각해주시면 감사하죠. 산악인이 죽을지도 모르는 높은 산을 왜 갈까요. 안 가도 상관없는데 기어이 가잖아요. 당장 효용성은 떨어져도 덕분에 높은 곳으로 갈수록 산소가 부족해 숨 쉬기 힘들다는 걸 알게 되잖아요. 발아래로 보이는 풍경이 어떤지도 깨닫게 되고요. 화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일상을 살아가면서 관심의 차이를 서로 경험했으면 좋겠어요.


이진수 기자 h2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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