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목 쳐내듯 통꽃으로 툭…동백꽃 따라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전승훈기자

입력 2022-04-08 14:06 수정 2022-04-08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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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놀라웠던 것은 길 가에 가득 피어 있는 동백꽃이었다. 순례길을 걷다보면 집집마다 빨간 동백꽃이 피어 있고, 항구도시 비고와 폰테베드라 같은 도시에서는 동백나무가 아예 가로수로 심어져 있다. 붉은색, 연분홍색, 흰색 동백꽃, 애기동백꽃, 카네이션과 장미를 닮은 겹 동백꽃….




호텔 식당에는 투명한 물 그릇 위에 분홍색 줄무늬 동백꽃이 띄워져 있는가 하면, 화장실에도 꽃봉오리째 떨어진 동백꽃이 꽃병에 장식돼 있다. 8000종이 넘는 동백나무가 자생하고 있는 갈리시아는 유럽 최대의 동백나무 관광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대서양을 접하고 있는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 해안은 아래쪽은 포르투갈, 위쪽은 스페인 갈리시아 주가 차지하고 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갈리시아의 주도다. 우리나라에서도 동백꽃은 주로 남해안, 제주, 울릉도와 같은 해안에 많이 피어나는데, 갈리시아 지방도 대서양이 가까운 해양성 기후로 습하고, 기온이 온화하기 때문에 동백나무가 잘 자란다고 한다.


갈리시아에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도 있지만, 겨울부터 봄에는 ‘카멜리아 루트(Camellia Route)’를 따라 여행하는 사람도 많다. 프로축구팀 ‘셀타 비고’로 유명한 항구도시 비고의 한 식당에서 만난 독일 관광객 팀은 “갈리시아 북쪽부터 남쪽도시를 가로질러 동백나무가 많이 피기로 유명한 10곳의 정원과 6곳의 카미노(순례길)를 따라 산책하는 여행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갈리시아의 동백꽃은 18세기 중국, 일본 같은 동양에서 포르투갈 선원에 의해 수입됐다고 한다. 처음에는 왕궁의 정원이나 ‘파소(Pazo)’라고 불리는 귀족들의 대저택 정원에 심어졌다. 폰테베드라의 교외에 있는 13세기부터 중세 귀족의 대저택으로 쓰였던 ‘파소 데 루비아네스’(Pazo de Ruibanes)는 ‘카멜리아 루트’ 여행에서도 손꼽히는 명소다.


파소 데 루비아네스 정문에는 ‘국제 카멜리아협회’가 인정하는 최고의 동백꽃 정원이라는 마크가 달려 있다. 17세기부터 조성된 이 정원에는 70헥타아르의 공간에 4500종 이상의 동백나무를 비롯해 유칼립투스, 목련, 포도나무 등 다양한 꽃과 나무가 심어져 있다.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빨간 꽃잎에 노란 수술이 있는 홑겹 동백부터, 카네이션과 장미를 닮은 겹동백까지 비에 젖은 색색의 동백꽃이 매혹적인 정원이다. 개구리밥 풀이 연못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개구리 정원’ 주변에도 붉은 동백꽃이 툭툭 떨어져 있다.


파소 데 루비아네스는 또한 포도밭에서 키우는 알바리뇨 품종의 포도로 담은 화이트 와인으로도 유명하다. 동백꽃 마크를 단 ‘파소 데 루비아네스 와인’은 2021년 갈리시아 베스트와인으로 선정돼 금메달을 획득하기도 했다.


대저택 안에 도서관에 있는 책상 위에는 각도기와 나침반, 조개 모양의 은그릇이 놓여 있었다. 가이드인 누리아 씨(34)는 “이 집의 최근 소유주는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컬렉션을 수집한 선장이었다”며 “그 중에서도 각도기와 나침반은 선장에게 꼭 필요한 네비게이션 도구”라고 말했다.

1730년 대에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소개한 이는 예수회 선교사이자 식물학자였던 게오르그 카멜이었다. 그의 이름을 따서 ‘까멜리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수석 외과의사였던 독일 출신 엥겔베르트 켐퍼는 동백을 ‘일본 장미’로 불렀다. 박원순 국립세종수목원 전시기획운영실장은 “원래 중국과 한국에도 자라는 동백에 ‘카멜리아 자포니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엥겔베르트 켐퍼가 일본에 있는 동안 처음으로 이 식물에 대해 기술했기 때문”이라며 “만약 그가 한국에서 동백나무를 처음 봤다면 코레아나(koreana)라는 종명이 붙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카멜리아는 19세기에 유럽 사교계에서 몸을 치장하는 장식품으로 사용되면서 전성기(1848~1860)를 맞이했다. 파리에서는 귀족들이 카멜리아를 액세서리로 착용했다. 극장이나 야외 나들이를 갈 때 여성들은 이 꽃을 목과 머리에 달았다.


알렉상드르 뒤마피스가 ‘춘희(椿姬·La Dame aux Camelias)’를 발표한 해가 1848년이다. 뒤마는 19세기 프랑스의 급변하는 사회상을 반영해 부르주아 사회의 편견과 인습을 고발하면서 신분 차이로 이뤄지지 못한 남녀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



“그녀(마르그리트 고티에)는 연극을 반드시 처음 상연하는 날 관람하여, 나 역시 그 시각에 가서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몰래 보았다. 그녀는 극장의 가장 비싼 박스석에서 감상을 하는데, 그녀 곁에는 항상 쌍안경과 눈깔사탕과 동백꽃 한 다발이 놓여 있었다. 동백꽃은 한 달에 25일간은 흰 동백꽃이었고, 나머지 5일 동안은 붉은 꽃을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를 ‘동백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이다.”


파리 사교계의 유명한 고급 창부 마르그리트와 지방 명망가 집안 출신으로 파리로 유학 온 청년 아르망의 절절한 사랑이야기인 ‘춘희’. 이탈리아 작곡가 베르디가 1853년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라는 제목의 오페라로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초연하면서 더욱더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극 중에서 여주인공 비올레타가 순수한 정절과 그리움을 간직하고자 늘 가까이했던 동백꽃은 당시 사교계에서 이 꽃이 어떤 의미와 상징으로 사람들의 문화 속에 자리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부분에서 비련의 여인 고티에는 폐결핵에 걸려 동백꽃과 같은 선혈을 토하며 쓸쓸하게 시들어간다. 그녀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그녀의 진심을 알게 된 아르망은 몽마르트 공동묘지에 묻힌 그녀의 묏자리 전체를 평소에 그녀가 지니고 다녔던 ‘흰 동백꽃’으로 꾸며놓는다. 슬픔의 이미지가 가득한 흰 동백꽃은 이 소설의 비극적 결말을 잘 표현한다.


19세기 말 동백꽃의 인기는 잠시 시들했다가 20세기 초 프랑스의 럭셔리 브랜드 샤넬(CHANEL)에 의해 세련되고, 우아함의 이미지로 다시 태어냈다. 프랑스 남서부의 수녀원에 딸린 고아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코코 샤넬은 그곳에 핀 동백꽃을 아주 좋아했다. 훗날 그녀는 동백꽃을 샤넬의 대표 이미지로 디자인해 드레스와 모자, 가방뿐 아니라, 목걸이와 귀걸이 같은 주얼리에도 동백꽃 장식을 사용했다. 검은색 포장 상자를 두른 리본에 달린 한 송이 흰색 동백꽃은 확실한 시그니처가 됐다.



동백꽃의 낙화는 꽃잎이 시들어 낱낱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싱싱한 꽃잎을 가진 통꽃으로 툭하고 떨어지는 게 특징이다. 꼿꼿하게 통째로 떨어지는 낙화에서 장렬한 기개를 느끼는 사람도 있고, 처연한 슬픔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가톨릭에서는 동백꽃을 순교자에 비유하기도 한다. 겨울에도 짙푸른 잎을 달고 한기가 채 가시기 전에 붉게 피어나 한겨울 매서움을 무색하게 만들고, 한창 꽃이 아름다울 때 하얀 눈밭에 자기 목을 쳐내듯이 시들지 않는 붉은 통꽃으로 툭 툭 떨어지기 때문이다. 눈 위에서 흐트러진 낙화는 진한 핏빛 순교를 연상시킨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목적지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하나인 성 야고보의 무덤을 찾아가는 길이다. 성 야고보는 팔레스타인에서 참수당해 순교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순교자의 상징인 동백꽃이 피어나는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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