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 전 구찌 화보는 이런 모습?…과거 그림에서 욕망이 보인다 [영감 한 스푼]

김민 기자

입력 2022-02-19 11:00 수정 2022-02-1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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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전으로 떠나는 여행
완전히 다른 시공간의 그림을 감상하는 법


여러분 안녕하세요, 김민 기자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전시는 모처럼 아주 먼 시간과 공간으로 떠날 수 있는 내용입니다.

2회에서 소개한 테이트미술관 ‘빛’ 전시가 200년 전 영국으로 떠났다면, 이번엔 500년 전 러시아로 떠나보려고 하는데요.

이 전시는 지난해 11월부터 시작했는데, 저는 최근에 듣고 뒤늦게 관람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서울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러시아 이콘: 어둠을 밝히는 빛’전입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러시아 종교화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화에는 전문가만이 알아볼 수 있는 종교의 교리적 맥락이나 도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종교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번 전시를 소개해도 되나 고민이 있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현장에서 도상이나 종교의 맥락을 떠나서도 느낄 수 있는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오늘은 종교화에 관한 전문적인 내용보다는, 그림으로 봤을 때 보이는 이야기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영감 한 스푼 미리 보기: 종교화에서 보이는 인간의 열망
러시아 이콘: 어둠을 밝히는 빛

1. 종교화를 볼 때 일반적으로는 교리적 내용을 통해 그림을 파악한다.

2. 그러나 그 교리적인 내용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면 신이 아닌 인간의 열망들이 보인다.

3. 러시아 이콘을 통해서도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것을 아름답다 여겼고 무엇을 갈망했는지 느껴볼 수 있다.

○ 글을 대신한 전달 매체
스트로가노프 공방, 솔브이체고드스카야, 손으로 만들지 않은 구세주(아케이로포이에토스)의 역사, 17세기 초,
우선 전시가 열리고 있는 서울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한국 천주교의 순교 성지에 2019년 조성돼 순교 역사를 소개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이콘박물관과 협력해 러시아 정교회의 15~19세기 유물 80점이 한국을 찾았습니다.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이콘’(Icon)은 신이나 성인의 모습, 성서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을 말하는데요.

흥미로운 것은 묘사의 목적입니다. 비잔틴 신학에서는 이콘을 보고 묵상을 하면 신이나 성인과 직접 닿을 수 있다고 봤다고 합니다.

즉 이콘은 신이라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매개였던 것이지요.

여기에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성서의 내용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스트로가노프 공방에서 만들어진 ‘손으로 만들지 않은 구세주의 역사’가 바로 이런 글을 대신한 전달 매체의 역할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트로가노프 공방, 솔브이체고드스카야, 손으로 만들지 않은 구세주(아케이로포이에토스)의 역사, 17세기 초,
이렇게 그림책 속의 삽화처럼 이야기를 전달하는 그림이 여러 장면에 걸쳐 엮여있습니다.

사찰에 가면 벽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연상케도 하는데요. 이 그림을 두고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성경 속 내용이나 교리를 설명해주었겠지요.

이콘을 이해하기 위해 이 그림 속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 손으로 만들지 않은 구세주
“에데싸(Edessa, 시리아와 터키 국경 근처 도시)의 군주 아브가르가 병에 걸렸다. 병을 고치고 싶었던 그는 예수가 보고 싶었고, 화가를 보내 예수의 추상을 그리게 했다.

그러나 화가는 예수의 얼굴에서 눈부신 광채가 빛나 그릴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예수가 자신의 얼굴을 아마포 천에 닦아 건네 주었다.

신하에게 받은 천을 펼쳐보니 예수의 얼굴이 천에 새겨져 있었고 그것을 본 군주 아브가르는 씻은 듯이 병이 나았다.”



위 내용이 바로 앞서 살펴 본 작품의 이야기입니다. 즉 천 위에 예수의 얼굴이 저절로 나타난 ‘기적’에 대한 내용이지요.

이 기적을 다룬 이콘은 러시아 지역에서 크게 유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시장 입구에서도 이 ‘손으로 만들지 않은 구세주’를 볼 수 있었습니다.

손으로 만들지 않은 구세주(아케이로포이에토스), 15세기말~16세기 초
위의 이야기를 통해 이 그림의 의미를 짐작한다면. 예수가 얼굴을 닦은 천에서 저절로 생겨난 그림을 모방한 버전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왜 500년 전 사람들은 이 그림을 그리고 교회에 걸었던 걸까요?

첫 번째는 글로 이야기를 전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고,

두 번째는 백마디 말보다 눈으로 직접 보게 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그냥 ‘예수가 얼굴을 닦은 천에서 저절로 얼굴이 나타났다’고 말로만 설명하는 것보다, ‘이런 모양이었다더라’며 그림을 함께 보여준 것이죠.

그래서 저는 이콘을 ‘믿음을 위한 그림’이라는 관점에서 감상했고, 이런 차원에서 보니 사람들의 이야기가 보였습니다.

우선 ‘손으로 만들지 않은 구세주’를 자세히 보겠습니다.

손으로 만들지 않은 구세주(아케이로포이에토스), 15세기말~16세기 초
이렇게 자세히 보면 예수의 얼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을 장식하는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곳에 화려하게 채색이 되었을 거라고 상상해볼 수 있겠지요.

조금만 더 상상력을 발휘해서 500년 전 러시아로 가본다면. 당시 일반인은 물감도 접하기 어려웠던 시절입니다.

이 때 반짝이는 황금색과 화려한 색채로 가득한 예수의 얼굴은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였을까요? 선망의 대상이었을 거라고 저는 생각이 됩니다.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없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사람들은 ‘정말 예수의 기적이 일어났겠구나’라고 믿게 된 것 아닐까요.

다른 이콘들에서도 이런 화려하고 섬세한 표현을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대천사 미카엘, 1700년 경, 볼가 지역에서 제작.
대천사 미카엘을 묘사한 이콘인데요. 어떤가요? 현실에서는 꽃이 아니면 쉽게 볼 수 없는 붉은색과 황금색의 조화가 무척 화려합니다.

또 미카엘이 입은 옷도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달리 보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미카엘의 옷은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1700년 경 러시아 볼가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 복장일 가능성이 크죠.

대천사 미카엘, 1700년 경, 볼가 지역에서 제작.
황금실을 레이스처럼 엮고 그 안에 또 식물 덩쿨 무늬 자수를 복잡하게 놓은 옷. 소매와 끝단에는 온갖 보석이 박혀있는 옷. 그리고 어깨에 걸친 붉은 망토. 어떤가요? 전 이 그림을 보며 300년 전 럭셔리 브랜드 화보가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답니다.

실제로 구찌(GUCCI)의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중세 시대 종교화나 고대 예술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죠. 그 또한 과거 예술의 국가나 종교의 맥락을 제거하고, 그것을 향했던 사람들의 열망을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패션 브랜드 구찌(GUCCI)의 디자이너 알레한드로 미켈레의 인스타그램 피드


○ 허약한 믿음을 단단하게 붙잡으려한 사람들의 흔적을 만나다
성화벽을 재현한 모습
이렇게 화려한 장식이 가득한 이콘을 보다보면, 믿음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면 복이 온다는 믿음.

간절한 바람과 노력은 끝내 결실을 맺는다는 믿음.

오랜 시간을 두고 보면 결국은 선함이 악함을 이긴다는 믿음.

이러한 믿음은 사실 종교적인 이유를 떠나서 좋은 삶을 살고 싶어하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때로는 오랜 시간이 걸리며 배신을 당하기도 하기에 지키기 어려운 믿음이기도 합니다.

저는 수백년 전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콘을 보며, 종교적인 내용을 표현한 사람들의 흔적.

즉 한 순간에도 뒤집어질 수 있는 허약한 믿음을 단단하게 붙잡으려 노력한 사람들의 흔적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미라의 성 니콜라이, 16세기 말, 니즈니 노브고로드
허약한 믿음을 붙잡으려 노력하는 이유엔 여러가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오래 살고 싶은 욕망, 고통받고 싶지 않은 마음, 부귀 영화를 누리고 싶은 욕심도 있었겠죠.

그런가 하면 새로 태어난 아이가 건강히 살기를 바라는 마음,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통받지 않길 기원하는 따뜻한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의 옳고 그름을 떠나, 종교의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그림의 내용을 해석하기에 급급하지 않고,

수백년 전 사람들도 지금의 우리와 비슷한 것을 꿈꾸고 욕망했다는 것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알렉산드로 미켈레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의 변모, 1680년대, 모스크바
고맙게도 이 전시는 무료로 열리고 있습니다(!)

수백년 전 러시아 사람들의 열망을 읽어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어 보세요.

한 줄로 보는 전시

조금은 낯선 나라 러시아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과거의 욕망을 읽어본다
추천지수(별 다섯 만점) ★★★☆

전시 정보

러시아 이콘: 어둠을 밝히는 빛
2021. 11. 25 ~ 2022. 2. 27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서울 중구 칠패로 5)
작품수 80여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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