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김환기 작품도 ‘디지털 진품 증명서’ NFT에 담는다

김태언 기자

입력 2022-02-19 03:00 수정 2022-02-19 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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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미술시장 핫이슈로 떠오르는 NFT
“미술작품 원본 가치를 팝니다”
“상업-대중성 갖춘 신시장 잡자”


3D 모델링 촬영 중인 이건용 작가. 에이트(AIT) 제공

《세계 미술계에 대체불가토큰(NFT) 열기가 뜨겁다. 유명 작가와 미술관들도 NFT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순수예술 작품이 어떻게 NFT가 되는지, 기성 미술계의 NFT 시장 진출로 예술계에 어떤 변화가 일고 있는지 들여다봤다.》

미술시장 핫이슈 NFT

지난해부터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미술 시장에서 블록체인 기술로 작품에 대한 소유권을 기록하는 대체불가토큰(NFT)이 뜨거운 이슈로 부상 중이다. 세계 최대 NFT 시장 데이터 통계 플랫폼인 논펀지블닷컴에 따르면 NFT 미술품 거래량은 지난해 3분기부터 급증해 8월에는 주간 거래량이 17억8000만 달러(약 2조1000억 원)를 기록했다. 지난해 3월 디지털아트 작가 비플의 NFT ‘매일: 첫 5000일’이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약 785억 원에 거래되며 NFT 미술 시장의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자본력과 커뮤니티를 갖춘 화랑과 미술관들도 유명 작가들과 함께 NFT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상업화랑인 현대화랑을 모태로 한 갤러리현대는 최근 “5월 미술품 NFT 플랫폼을 오픈하겠다”고 밝혔다. 갤러리현대가 설립한 디지털 아트 회사 ‘에이트(AIT)’는 김환기의 전면점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와 이중섭의 ‘황소’를 NFT로 제작할 예정이다.

NFT 플랫폼에 들어가 본 사람이라면 다소 의아할 수 있다. 이제껏 NFT 미술 시장에서는 디지털 아트 작품이 대세였다. 작가들 또한 익히 들어보지 못했던 신진 작가가 대부분이었다. 미술관에 두 발로 걸어가야 볼 수 있었던 유명 작가들의 회화 작품이 어떻게 NFT가 된다는 걸까. 벽에 걸어놓고 감상할 수도, 만질 수도 없는 NFT는 왜 만들어지고 팔리는 걸까.
○ NFT 시장에 뛰어든 순수예술 작가들
NFT는 일종의 디지털 진품 증명서다. 블록체인이라는 디지털 장부에 이미지 파일이나 동영상 저작물을 업로드하고 작품명, 작가명, 에디션 수량 등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 보니 똑같은 디지털 파일의 사본이 수없이 많아져도 NFT만이 원본임을 인정받는다. 회화 원화와 프린트 포스터 굿즈의 무게감이 다른 것처럼, 디지털상에서도 원본과 사본 간에 가치 차등을 둘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NFT 소비자는 작품이라는 ‘물질’이 아닌 원본이라는 ‘가치’를 산다고 이해하면 된다.

미술계 내에서 NFT 시장의 탄력을 받은 건 디지털 아트 작가들이었다. 이제껏 아날로그 예술 작품은 전문가 감정을 통해 원본과 사본을 구분할 수 있었지만 디지털 아트는 그렇지 못했다. 디지털상에서 원본과 사본을 구별할 수 없다는 문제점은 창작자의 위치와 수익을 보장하지 못했고, 디지털 아트를 비주류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하지만 NFT로 디지털 원본을 입증할 수 있는 새로운 생태계가 열리면서 기존 미술 시장의 문턱을 넘지 못했던 신진 작가와 디지털 아트 작가들은 NFT 플랫폼에서 소비자와 직거래를 시작했고, 팬덤까지 형성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회화, 조각 등 순수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던 작가들 역시 NFT 미술 시장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궁금증은 여기서부터 생긴다. 실물 원본이 어떻게 NFT가 된다는 것일까. 이 질문은 곧 ‘실물 원본을 어떻게 디지털화하는가’로 이어진다. 시장이 형성되던 초반, 순수예술 분야 작가들의 NFT는 조악한 수준이었다. 일부 작가는 자신의 실물 작품을 카메라로 찍은 디지털 이미지를 NFT로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는데, 누가 어떤 이유로 저 이미지 파일 NFT를 돈 내고 사냐”는 지적이 이어졌다.

김태호의 실물 원화 ‘Internal Rhythm 2020-26’(왼쪽 사진)을 바탕으로 만든NTF ‘Internal Rhythm_hole_blue’. 표갤러리 제공
이에 실물 원화를 재해석해 영상으로 만드는 ‘디지털 아트워크’가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다. 지난해 9월 NFT 플랫폼 ‘클립드롭스’에 올라온 김태호(74)의 ‘Internal Rhythm_hole_blue’가 대표적이다. 김태호의 실물 원화 ‘Internal Rhythm 2020-26’(2020년)을 재해석해 영상으로 시각화한 것이다. 김태호는 약 20개 물감을 덧칠한 뒤 표면을 깎아내는 식의 작업으로 유명하다. 그의 NFT를 보면, 깎여 나간 부분을 여러 물감이 섞여 떠다니는 강가로 표현했다. 47초짜리 영상 중간에는 갈매기 소리와 돛단배가 등장해 생동감을 살린다.

그의 실제 모습을 본떠 만들어진 아바타는 디지털상에서 ‘바디스케이프 76-3’을 그린다. 에이트(AIT) 제공
작가별 표현 방식과 작품 세계가 다르기에 디지털 아트워크 방법도 다양하다. 올해 NFT 작업에 나서는 국내 1세대 행위예술가 이건용(80)은 ‘퍼포머’라는 정체성을 살려 소비자가 직접 보디페인팅 과정에 일부 참여하는 방식을 차용했다. 구매창을 클릭하면, 이건용의 실제 모습을 본뜬 아바타가 나온다. 아바타는 소비자가 고른 캔버스와 물감 색에 따라 퍼포먼스를 진행한다. 곧이어 일명 ‘하트 작품’이라 불리는 이건용의 ‘바디스케이프 76-3’ 형상이 탄생한다. 아바타의 퍼포먼스 과정과 결과물인 디지털 작품이 NFT로 만들어져 판매되는 식이다.
○ 도전 나선 갤러리와 미술관
갤러리현대가 설립한 디지털 아트 회사 ‘에이트’는 올해 5월 미술품 대체불가능토큰(NFT) 플랫폼을 오픈하고, 올 하반기 이중섭의 ‘황소’(왼쪽 사진)과 김환기 대표작 전면점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16-Ⅳ-70 #166’을 NFT로 만든다. ⓒ환기재단, 환기미술관, 에이트(AIT) 제공
유명 원로 작가들의 NFT 시장 진입 흐름에 갤러리는 빠질 수 없는 존재다. 상대적으로 기술에 익숙하지 않은 원로 작가들은 갤러리의 지원을 받아 디지털 아트워크를 진행한다. 앞서 설명한 김태호 작가는 표갤러리 소속으로 활동한다. 올해 표갤러리는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을 만든 김영원 조각가(75)의 작품 NFT도 준비 중이다.

NFT 시장은 갤러리 입장에서 상업성과 대중성을 모두 갖춘 공간이다. 현실에서는 원화 한 작품이 팔리지만, NFT 시장에서는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여러 에디션을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고재, 아라리오갤러리 등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클립드롭스에 선제적으로 소속 작가 NFT를 내놓았고, 한국화랑협회도 회원 화랑들이 클립드롭스에 작품을 올릴 수 있도록 돕고 있다. 14일 기준 금산갤러리, 리서울갤러리 등 14개 화랑이 협회의 도움을 받아 NFT 사업에 진출했다.

갤러리현대는 NFT 플랫폼 운영을 주요 사업 영역으로 하는 회사 에이트를 설립하고, NFT 미술품 거래 플랫폼 ‘에트나(ETNAH)’를 올해 5월 공개할 계획이다. 약 3개월간 시범 운영하고 8월 정식 버전을 가동할 예정이다. 이건용의 NFT가 이 플랫폼에서 거래된다. 도형태 갤러리현대 대표는 “기존 고객들은 NFT 결제 수단인 암호화폐 활용을 어려워한다”며 “이들을 위해 현금을 암호화폐로 바꾸는 자체 시스템을 구축해 신용카드 결제가 가능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술관들도 작품을 대중화하고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NFT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영국 대영박물관은 지난해 9월부터 소장품인 에도시대 일본 작가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주요 작품을 NFT로 만들어 판매 중이다. 담당 블록체인 기업 라콜렉시옹의 최고경영자(CEO)는 “대영박물관을 한 번도 방문한 적 없는 새로운 관객들을 유입시킬 기회”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간송문화재단이 지난해 재정난 해소 방안으로 훈민정음 혜례본을 100개 한정 NFT로 제작해 판매했다. 미국에서는 지난달 ‘시애틀 NFT 뮤지엄’이 개관해 NFT 판매 최고가 기록을 가진 크립토펑크 등의 NFT를 전시 중이다. 물리적 공간을 통해 NFT 커뮤니티를 구축하려는 시도다.
○ “고유 가치 창조하는 작가만 살아남을 것”

NFT 미술 시장이 기성 미술계 중심으로 움직이면 NFT 질이 보장될 것이라는 일각의 기대가 있다. 실제로 세계 최대 규모의 NFT 거래 플랫폼인 ‘오픈시’를 살펴보면, 누구나 NFT를 올릴 수 있는 플랫폼 특성상 자율권이 보장되는 반면 질 낮은 작품들도 상당수 눈에 띈다. 전통 미술계는 작품성과 시장성이 증명된 유망 작가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NFT 시장의 안정성을 보장할 수 있다.

하지만 신인의 활약이 가려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유명 작가가 시장에 유입되고 그 이름값에 시선이 쏠리면 수평적인 예술 유통 구조가 무너질 수 있다는 점에서다. 특히 미술계 인사와 협업해 자체 심사로 작품을 선별하는 NFT 플랫폼들이 늘면서 서열화의 속도는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도 일부 화단은 트위터나 클럽하우스를 통해 화단 구성원들에게만 NFT 플랫폼 ‘파운데이션’에 가입할 수 있는 초대장을 보내고 있다.

미술계 내부만의 이권 다툼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의견도 있다. 팝아트 작가이자 지난달 책 ‘NFT는 처음입니다’를 발간한 김일동 작가는 “유튜브를 통해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이 유명 방송인이 되는 것처럼 NFT 플랫폼은 누구나 창작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며 “NFT는 블록체인상 표식을 새기는 정보기술(IT)일 뿐, 사회가 기술에 적응만 되면 기성 작가든 신진 작가든 본인만의 고유한 가치를 창조해내는 작가의 NFT만이 시장에서 살아남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예술품으로서의 NFT 의의가 모호한 현 시장에서는 디지털상에서의 ‘아트’가 무엇인가에 대한 재정의가 우선돼야 한다고 말한다. 이요훈 IT 칼럼니스트는 “NFT는 작품이 아니라 기술인데, 지금 NFT 시장은 우선 돈이 되니 이 점을 간과한 채 뛰어들고 있는 것 같다. 실물 그림을 디지털화하는 것은 일종의 양념일 뿐, NFT 아트라 칭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 NFT 전문가도 “현재 NFT 시장에서 거래되는 이미지와 영상들이 과연 예술로 불릴 수 있는가에 대해서 고민할 시점”이라며 “디지털 ‘아트’라 지칭할 수 있는 기준을 예술사적으로 재정의해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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