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조카며느리 마지막 길, 조문객 16명-화환2개가 전부

용인=유채연기자

입력 2021-10-25 17:23 수정 2021-10-26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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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조카며느리 고 박태정씨의 유족과 안중근기념사업회 직원 등이 박씨의 영정과 운구를 들고 경기 용인 장지로 향하고 있다. 사진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안중근 의사의 조카며느리 박태정 여사가 23일 별세했다. 향년 91세.

고인은 안 의사의 조카이자 남편인 안진생 씨가 묻혀있는 경기 용인시 천주교묘지에 25일 안장됐다. 고인은 남편이 1988년 먼저 세상을 뜬 이후 30여 년 간 가난과 병마와 싸워왔다. 7월 폐렴으로 병세가 악화돼 3개월 만에 숨을 거뒀다. 유족들은 경제적 여력이 없어 빈소를 차리지 못했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은 취재진을 포함한 조문객 16명과 화환 2개가 전부였다.

고인은 서울대 영문과 3학년 재학 중 외국계 회사에 다니다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정근 의사의 아들 진생 씨와 1954년 결혼했다. 당시 고인은 교수들을 능가할 정도로 영어와 프랑스어 실력이 뛰어난 재원이었다. 진생 씨는 이탈리아 제노마 공학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조선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남편 진생 씨가 1962년 외교관 생활을 시작하며 고인과 두 딸도 해외에서 오래 살았다. 하지만 진생 씨가 1980년 외교안보연구원 본부 대사로 근무하던 중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 해직된 이후 뇌경색이 발병해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모아온 가산을 치료비로 거의 썼다고 한다.

진생 씨는 “아버지의 독립운동 업적으로 내가 덕을 볼 수는 없다”며 독립운동 서훈 등에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인은 남편 병간호를 하며 시아버지의 독립운동 기록을 찾아 관계기관에 제출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섰다. 고인의 노력으로 안정근 의사는 1918년 대한독립선언서 서명 등 공적을 인정받아 1987년 독립장을 서훈 받았다.

진생 씨가 투병 끝에 1988년 사망하자 고인 등 가족들은 생활고에 시달렸다. 별다른 직업이나 소득이 없어 기초연금과 가계지원비 등을 포함한 약 100만 원이 고인과 두 딸, 손녀딸 우 씨까지 네 식구의 한달 생활비였다.

고인의 마지막 보금자리는 서울 양천구의 49㎡(15평) 임대아파트였다. 이마저 서울주택도시공사(SH)에서 임대료를 인상한다고 하면 인상분을 구하지 못해 주변에 손을 벌려야 했다고 한다. 고인의 손녀딸 우성화 씨(35)는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거나 집을 담보로 빚을 받는 방식으로 생활해왔다”고 했다.

이날 발인식에 온 한 인척은 “고인의 가족은 안중근 의사 유족들 사이에서도 ‘아픈 손가락’이었다. 너무 가난하게 살아 가족들이 도움의 손길을 나눴을 정도”라고 전했다. 2017년 본보에 고인 가족의 안타까운 사연이 전해지자 독지가가 집을 기부하겠다고 나섰지만 고인은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써 달라”며 거절했다.

고인은 안중근 의사 의거일(10월 26일) 112주년을 사흘 앞두고 숨을 거뒀다. 고인의 큰딸 기수 씨도 올 3월 하늘로 떠나 안정근 의사의 가족은 고인의 둘째 딸 기려 씨와 우 씨 등 둘만 남았다. 생전 고인을 도와온 이종수 연세대 교수는 “고인이 평생 간직해온 안중근, 정근 형제가 찍은 사진 필름을 받아 특수 현상을 시도하고 있다. 두 의사의 유해도 수습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중요한 사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용인=유채연 기자 ycy@donga.com
용인=이채완 인턴기자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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