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용사 희생 기억할 때, 그들은 비로소 영웅이 된다”

이호재기자

입력 2021-06-15 03:00:00 수정 2021-06-15 05: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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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용사 포토 에세이 펴낸 사진작가 라미 현

사진작가 라미 현이 10일 서울 중구 서울도서관 외벽에 전시된 6·25전쟁 참전용사 131명의 흑백사진을 두 손으로 받드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작품을 찍은 그는 “참 전용사를 받든다는 생각으로 사진을 찍어 왔다. 이들이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아흔의 노병이 제복을 꺼내 입었다. 오른팔은 포탄 파편에 맞아 온데간데없다. 수류탄에 잃은 오른 다리는 의족으로 대신했다. 왼팔과 왼 다리만으로는 제대로 서지 못해 지팡이를 짚었다. 하지만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는 눈빛만은 여전히 단단하다. 전쟁은 퇴역 군인의 육체를 망가뜨렸지만 영혼은 앗아가지 못했다. 1925년 미국에서 태어나 6·25전쟁에 참전한 미 육군 예비역 대령 윌리엄 빌 베버는 당당했다. 그는 미국 워싱턴의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에 설치된 동상의 모델 중 한 명이다.

사진작가 라미 현(본명 현효제·42)은 2018년부터 6차례에 걸쳐 그의 사진을 찍었다. 작가는 10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팔과 다리를 잃은 순간 느낀 통증을 물으니 베버 대령이 씩 웃으며 ‘하나도 아프지 않았어’라고 대답했다. 사진을 액자에 담아 건네자 ‘한국이 내게 빚진 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라미 현이 9일 펴낸 에세이 ‘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마음의숲)에는 6·25전쟁 참전용사들의 사진과 사연이 켜켜이 담겨 있다. 그는 2018년부터 4년에 걸쳐 22개국 1500여 명의 참전용사 사진을 촬영했다.

2001∼2003년 대한민국 육군 병사로 복무한 그는 당시 ‘주적은 북한이 아니라 군 간부’라고 생각할 만큼 군에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2013년 육군 장교와 부사관, 병사들의 사진을 찍는 작업을 의뢰받아 진행하며 생각을 바꿨다. 오랜 기간 떨어져 지내 딸에게 원망을 듣는 등 한 명 한 명이 털어놓는 이야기를 들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의 삶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리고 참전용사의 사진을 찍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참전용사의 사연은 꼰대들이 ‘나 때는…’이라며 풀어놓는 자기 자랑이 아니다”라며 “치열하고 생생한 참전용사의 기억에서 6·25전쟁을 바라보는 긍정적, 부정적 시각을 봉합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책에 실린 미 해병대 출신의 살바토레 스칼라토는 라미 현이 처음 만난 6·25전쟁 참전용사다. 둘은 2016년 경기 고양시에서 열린 대한민국 방위산업전에서 사진작가와 초청 군인으로 처음 만났다. 2년 뒤 라미 현이 살바토레를 찾아 미국으로 갔지만 살바토레는 “사진을 팔러 온 거냐”며 삐딱하게 맞았다. 참전용사 사진이나 영상을 찍어준다며 돈을 요구하는 이들로부터 당한 경험 때문이었다. 라미 현은 살바토레를 겨우 설득해 사진을 찍었다.

그가 미국, 영국 등을 돌아다니며 참전용사들의 사진과 영상을 찍는 데 든 비용은 약 5억 원. 외부에 손을 벌리지 않고 그가 다른 사진작업을 통해 번 돈으로 충당했다. 라미 현은 “정부에서 돈을 받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결국 돈 벌려고 하는 짓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게 싫었다”고 했다.

라미 현은 지난해 7월 별세한 백선엽 장군(1920∼2020)의 생전 모습도 사진으로 담았다. 2019년 당시 백 장군은 거동이 쉽지 않았지만 꼿꼿이 서서 사진을 찍으려고 했다. 군인은 늘 당당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평소 신념 때문이었다. 그는 “부인의 만류로 백 장군이 결국 휠체어에 앉아 사진을 찍었는데 끝까지 부끄러워했다. 촬영 당시 99세였는데도 여전히 눈빛은 살아 있었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그를 향해 전쟁을 미화한다고 비난하지만 그는 이미 벌어진 전쟁을 제대로 바라보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참전 군인들은 자신을 전장에서 죽은 동료를 두고 온 겁쟁이라고 말해요. 우리가 인정할 때에야 그들은 스스로를 영웅으로 바라봅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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