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채소장사로 3자녀 키워… 둘째가 올해 시인 등단”

이지훈기자

입력 2017-11-07 03:00 수정 2017-11-07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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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양시장의 터줏대감들

자양전통시장에는 시장을 40년간 지킨 상인이 많다. 골목 사이사이 위치한 시장 특성상 상인 대부분이 자양동 주민이다. 리어카 시절부터 시장 골목을 지킨 김정성 씨(왼쪽 사진), ‘자양시장 기부천사’로 유명한 장춘조 씨.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오랜 전통이 있어 자양전통시장 사람들의 추억도 길다. 리어카 상인으로 시작해 일흔이 넘는 나이에도 자양전통시장을 지키는 터줏대감이 있다. 채소 가게를 운영하는 김정성 씨(73)다. “39세 때 친구와 하던 사업이 망했어. 리어카 놓고 파라솔 치고 장사했지. 닭장사도 하고 생선, 과일도 팔고 슈퍼도 했어. 그러다가 채소한 지는 30년이 넘었어.”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김 씨의 세 자녀는 시장에서 나고 자랐다. 채소를 팔아 두 명의 딸과 막내아들 모두 대학원까지 졸업시켰다. 자녀 이야기가 나오자 김 씨는 해사하게 웃어보였다. “우리 둘째 딸이 시인이야, 시인. 올 초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둘째 딸 김기영이가 당선됐어. 여기 시장 아니었으면 (세 자녀 키우는 건) 가당치도 않았지.”

오랜 기간 시장을 지킨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터를 잡은 딸도 있었다. 낡았지만 늘 사람들로 북적였던 이곳을 이은자 씨(39·여)는 “어릴 땐 놀이터였는데 지금은 고향이라고 부르는 곳”이라고 말했다. 이 씨는 자양전통시장에서 반찬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자양동에서 태어나 근처에서 초등학교과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졸업한 ‘자양동 토박이’다. 이 씨의 어머니는 약 40년 전부터 이곳에서 채소를 팔았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번 돈으로 딸 셋을 키웠다고 했다. 이 씨를 포함한 세 자매는 모두 자양동에 살고 있다고 했다. 이 씨는 “어렸을 때부터 늘 시장 주변을 오가며 자랐다”며 “학교 끝나면 시장으로 와서 같이 물건도 치우고 엄마 돕는 게 일상이었다”고 말했다.

결혼 후 다른 지역에서 살다 4년 전 이 씨는 두 자녀와 함께 자양동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하는 채소 가게 옆에 이 씨는 반찬 가게를 차렸다. 어머니를 따라 자양동에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그의 자녀인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4학년 아이는 이 씨처럼 이곳 자양전통시장에서 먹고 뛰놀며 지낸다. “아무래도 시장엔 어린아이가 귀하다 보니 귀여움을 독자치하고 있죠. 어쩌다 보니 3대가 이곳 시장에서 살고 있네요.”

자양동에서 나고 자라진 않았지만 자양동을 토박이보다 더 사랑하는 상인도 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자양동주민센터에 매년 500만 원씩 기부하는 ‘소문난 만두집’의 장춘조 씨(59)다.

3일 오후에 찾은 장 씨의 5평 남짓한 가게에는 기름 냄새가 풍겼다. 찹쌀도넛, 꽈배기, 찐빵, 만두, 튀김 등 먹음직스러운 음식들로 가판대는 가득했다. 11월 초라 낮이어도 쌀쌀했지만 장 씨는 기름때 묻은 반팔 반바지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밤낮 돈을 벌지만 스스로에겐 인색하다는 장 씨는 옷 한 벌 안 사 입는다고 했다. “자양동 와서 먹고살 만해졌으니 돌려드리자는 거지요. 지금은 여기 살기도 하고. 허허.”

2014년 12월 장 씨의 기부 인생은 시작됐다. 첫해인 2014년엔 490만 원, 2015년엔 502만 원 그리고 지난해엔 512만 원을 냈다. 적지 않은 돈이지만 장 씨는 아깝지 않다고 했다. 그는 “경상도 고성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살았는데 동네에서 제일 못살았다”며 “쌀이 없어 고구마나 나무줄기 삶아 먹던 기억 때문에 늘 트라우마에 시달렸는데 그걸 치유해보고자 시작한 기부”라고 말했다.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로 살다 이젠 도움을 줄 수 있어 장 씨는 기쁘다고 했다. “그래도 집사람 아니었으면 가능하지도 않았어요. 500만 원이 어디 작은 돈인가요. 흔쾌히 허락해 주니 좋은 일하며 사는 것이지요.”

매년 수백만 원을 기부하는 그도 처음부터 일이 잘 풀린 건 아니었다. 2002년 5월 이곳 자양전통시장에 오기 전 장 씨 부부는 방황을 거듭했다.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동에서 도넛 가게를 하다가 아내의 무릎에 물이 차 큰 수술을 하게 된 것. 장 씨는 급하게 일자리를 구하고 아내는 보험설계사로 일했다. 부부가 맞벌이로 고군분투해도 호주머니에 모이는 돈은 없었다. 부부는 “힘들어도 다시 시작해보자”며 시장에 도넛 가게를 열었다.

지금은 시장 명물이 됐다. 아들(27)도 장 씨에게 기술을 전수받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맏딸 결혼까지 시켰다며 장 씨는 좋아했다. “여기 시장 아니었으면 절대 불가능했을 행복이지요. 평생 여기에서 도넛 튀기며 동네 사람들 돕고 살겠습니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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