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볼 수 없던 日기술… 반도체-조선은 이미 추월

박형준 기자

입력 2015-08-15 03:00:00 수정 2015-08-16 14:5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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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되돌아본 한일 경제전쟁 50년


1955년 8월 한국에서 처음 생산한 자동차가 나왔다. 상표는 ‘시발(始發)’. 자동차 생산을 처음 시작했다는 의미를 담았다. 6인승 지프로 차체는 미군이 버린 폐차를 활용해 만들었다. 유리는 강화유리가 아니어서 비포장도로를 달릴 때 자주 깨졌다.

당시 일본에는 도요타, 혼다, 닛산 등 자동차 제조업체가 11곳 있었다. 그해 자동차 생산 대수는 승용차 2만268대, 트럭 4만3857대 등 모두 6만8932대. 그중 1231대는 해외로 수출했다. 미쓰비시가 1917년 일본 최초의 승용차 ‘모델 A’를 만들 정도로 자동차 산업 역사는 깊다.

당시 한국과 일본의 경제력 격차는 컸다. 한국은 6·25전쟁을 거치면서 산업 기반이 거의 무너졌지만 일본은 6·25전쟁을 발판 삼아 군수 물자를 수출하면서 산업을 정비했다. 올해로 광복 70주년,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았다. 그 사이 한국은 국가 주도형 성장 모델과 이병철, 정주영, 구인회 등 걸출한 기업가들의 땀방울로 급속도로 성장했다. 최근 일본을 앞서는 산업이 속출할 정도다. 동아일보는 전국경제인연합회와 공동으로 ‘한일 경제전쟁 50년사’를 들여다봤다.


○ 넘볼 수 없는 존재였던 일본

정부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년)을 세웠을 당시 연평균 7.1% 경제성장률을 이루기 위해선 12억 달러(약 1조4100억 원)의 투자 자금이 필요했다. 하지만 1961년 미국 존 F 케네디 정부가 원조 정책을 무상 원조에서 유상 원조로 바꾸면서 국내에 돈줄이 말랐다.

종잣돈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통해 마련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금 성격으로 무상 3억 달러 청구권 자금과 유상 2억 달러의 공공 차관 등 5억 달러를 내놨다. 청구권 자금의 55.6%는 포항제철 등 제조업에 투입됐다. 18%는 경부고속도로, 소양강댐 등 사회 인프라 구축에 쓰였다.

국교 정상화 이후 박정희 정부는 조선, 철강, 전자, 섬유, 화학 등 중화학공업을 기반으로 한 일본식 수출 경제를 롤 모델로 설정했다. 1973년 포항제철소를 완공시키는 등 정부 주도로 중화학공업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여기에 ‘자식에게 가난만큼은 물려주지 않겠다’는 한국 특유의 근면성이 더해지면서 ‘한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다. 다만 한국이 일본에서 일방적으로 소재 및 부품을 수입하다 보니 한일 간 교역이 확대될수록 대일(對日) 무역적자도 커지는 구조적 문제점도 안게 됐다.


○ 일본과 경쟁하는 한국으로

1990년 이후 한일 경제전쟁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조선·해양,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3개 산업은 점유율이 과거 일본에 뒤졌지만 최근 역전을 이끌어 냈다. 실제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2010년 한국 14.2%, 일본 20.3%에서 2013년 한국 16.2%, 일본 13.7%로 바뀌었다. 스마트폰의 경우 일본이 한국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크게 격차를 벌렸다. 글로벌 시장조사회사인 IDC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한국 스마트폰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29.3%지만 일본은 3.9%에 그쳤다.

중공업, 철강, 자동차, 자동차 부품 등 대표적인 국가 기간산업들은 여전히 일본이 우위를 보이지만 그 격차는 줄었다. 한일 자동차 업계의 대표 기업인 현대자동차와 도요타의 경우,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도요타가 더 높다. 하지만 2013년 영업이익률은 현대차가 9.5%로 도요타(6.0%)보다 높다. 그만큼 현대차가 더 많이 남는 장사를 했다는 의미다.

권혁민 전경련 커뮤니케이션팀장은 “한일 경제 관계가 과거 수직적 의존 관계에서 지금은 수평적 협력 관계로 바뀌었다”며 “앞으로 한일 협력을 통해 더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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