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명품 상륙 30년

동아일보

입력 2013-05-25 03:00:00 수정 2013-05-25 09: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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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은 이제 ‘소수만의 사치’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대중화됐다. 이에 따라 명품에 대한 인식도 달라져왔다. 동아일보는 미화된 표현인 ‘명품’ 대신 ‘해외 유명 브랜드’로 바꿔 쓰고 있지만 이 기사에선 상징적 의미를 살려 ‘명품’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사진은 명품업계를 대표하는 브랜드인 루이뷔통의 ‘모노그램 네버풀’ 핸드백. 루이뷔통코리아 제공
‘럭셔리를 우리말로 어떻게 번역하는 게 좋을까. 사전에 나온 대로 사치품이라고 하면 너무 부정적인 것 같은데…. 그렇다고 그대로 쓰면 무슨 뜻일지 잘 모를 것 같고….’

1995년 프랑스 유명 패션 브랜드 루이뷔통의 국내 첫 홍보담당 매니저였던 손주연 씨(45)는 본사에서 도착한 보도자료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문득 일부 신문이 유명 수입 패션 브랜드들을 ‘명품(名品)’이라 쓰는 걸 봤다.

‘이름 난 제품’ ‘거장이 만든 걸작’….

홍보 담당자로서는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고 함축적인 단어였다. 손 씨는 ‘명품’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명품’은 이후 한국 사회에서 해외 유명 패션 브랜드를 지칭하는 말로 굳어졌고 루이뷔통은 지금껏 명품 업계의 선두주자로 불리고 있다.

루이뷔통은 1984년 롯데면세점에 들어가면서 한국 시장에 처음 진출했다. 1991년에는 서울 호텔신라에 매장을 냈고 그해 9월에는 한국 지사인 루이뷔통코리아가 출범했다.

손 씨가 루이뷔통에 합류한 것은 한국 법인이 설립된 2년 후인 1993년이었다. 그때만 해도 루이뷔통은 서울 매장 1곳과 면세점 5곳을 운영하던 작은 브랜드였다. 사무실 직원은 손 씨를 포함해 겨우 3명이었다.

현재까지 루이뷔통코리아를 이끌며 업계 최장수 지사장으로 꼽히는 조현욱 회장(49)은 1년 뒤인 1994년 본사에서 파견돼 왔다. 비슷한 시기에 해외 명품 브랜드들이 잇따라 지사를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한국 시장 공략에 나섰다. 루이뷔통의 전국 매장 수(면세점 제외)는 22개로 늘었고 매출액은 4974억 원(2011년 기준)에 이른다.

세계 최고의 럭셔리 기업 LVMH그룹의 대표 브랜드인 루이뷔통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명품 브랜드다. 매출 비중은 물론이고 업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워낙 커서 루이뷔통의 성장세는 대한민국 명품 시장의 성장세를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올해 들어 서울 강남 지역의 일부 루이뷔통 매장의 매출이 감소한 것을 놓고 설왕설래가 이어지는 것도 그 상징성 때문이다. 과연 한국에서 명품의 성장세가 꺾인 것인가. ‘가치소비’가 대두되면서 명품에 대한 시각이 점차 달라지고 있다. 30년간 거침없이 시장을 키워온 한국의 명품 업계도 올해 전환점을 맞았다.



▼ 루이뷔통 “한국에서 어디 팔리겠나” 처음엔 시큰둥 ▼

1980년대… 명품 소비의 시작

1980년대 세계 명품 시장의 큰손은 일본인들이었다. 거품경제의 호황을 누리던 일본인들은 세계 전역으로 여행을 다니며 명품을 싹쓸이했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은 일본인들을 한국에 오게 만들기 위해서는 면세점에서 명품을 팔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 회장은 장녀인 신영자 롯데쇼핑 부사장(현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에게 이른바 ‘3대 명품’으로 꼽히는 루이뷔통, 샤넬, 에르메스를 도입하는 프로젝트를 맡겼다. 하지만 프랑스에 있는 루이뷔통 본사와는 직접 연락하기조차 힘들었다. 1981년부터 신 부사장은 루이뷔통의 면세사업권을 가진 부루벨 홍콩 지사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성공할 수 있겠나”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다.

신 부사장은 한국에 일본인 관광객들이 늘어날 것이고, 향후 수입금지가 풀리면 면세점 매장이 한국 진출을 위한 교두보가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3년 설득 끝에 결국 1984년 루이뷔통이 롯데면세점 서울 소공점에 들어왔다. 이를 발판으로 1985년 에르메스, 1986년 샤넬 부티크 매장까지 유치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1986, 87년 사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수입 자유화 조치는 수입 브랜드들이 급속히 유입되는 계기가 됐다. 외국어를 무기로 해외 문물을 빨리 접한 사업가들이 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1974년부터 면세 사업을 시작했던 신용극 유로통상 회장(68)은 1987년 현대백화점 본점에 버버리 매장을 열었다. 내수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권기찬 웨어펀인터내셔널 회장(62)은 1986년 회사를 열고 아이그너와 겐조를 수입했다. 이들은 대표적인 국내 ‘명품 1세대’로 분류된다.

한국외국어대 프랑스어과 출신인 신 회장은 “남문면세점 무역부장으로 일하며 프랑스에 드나들다 명품업체 본사들로부터 직접 한국 에이전트를 하지 않겠느냐고 권유를 받은 것이 수입업에 뛰어든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같은 학교 아랍어과 출신인 권 회장은 한양주택에 입사해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지사에 파견돼 당시 중동에 속속 유입되던 유럽의 유명 브랜드들을 접하게 됐다. 권 회장은 “한양이 한때 패션사업을 추진하면서 라이선스 계약을 하기 위해 각국을 돌아다닌 것이 브랜드에 대한 정보를 남들보다 빨리 익히는 계기가 됐다”고 회상했다.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에서 시작되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 명품거리는 국내 명품 산업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1997년 이 거리에 처음 등장한 ‘구치’ 매장은 지난해 리뉴얼을 통해 더 화려하게 재탄생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1990년… 오렌지족, 명품관을 삼키다

“‘오렌지족’을 잡아야 할 텐데….”

1993년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 팀장이 된 유제식 상무(52)는 명품관을 어떻게 잘 채울지 고민했다. 그는 현재 갤러리아 명품관 점장이다.

해외여행을 다녀온 젊은 소비자들을 중심으로 수준 높은 브랜드에 대한 수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은 소비문화에 급속도로 빠져들던 젊은이들을 가리키는 ‘오렌지족’이 모이는 집산지였다. 1991년 시인이자 영화감독 유하는 압구정동을 ‘욕망의 통조림’이라고 표현했다.

압구정동 한양쇼핑 자리에 갤러리아 명품관이 생긴 게 바로 이때다. 1990년 9월 버버리, 발리 등 당시 최고 인기 브랜드를 들여와 문을 열었다.

현대백화점과 파네라이, IWC 등 명품 시계, 보석 브랜드들이 함께 마련한 자선경매 이벤트가 16일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 문화홀에서 열렸다. 명품 업체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소비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사회공헌활동에 나서는 브랜드가 늘어나고 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 ‘욕망의 분출’ 오렌지족… ‘대세의 완성’ 청담동룩 ▼

명품이란 말이 ‘해외 패션 브랜드’를 가리키는 말로 퍼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1980년대까지 언론에서 명품이라는 단어는 도자기 같은 전통상품을 지칭하거나 가구, 오디오, 피아노 등의 광고에 등장하는 정도였다.

유 상무는 “당시에는 명품만으로 백화점 매장을 구성하기에는 브랜드가 모자랐지만 강남권이 막 개발되면서 오렌지족이 등장하고 있었고, 해외시장에서 명품이 커지고 있어 과감하게 명품관을 개점했다”며 “오렌지족이 수입 브랜드에 갈증을 느끼고 있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1993년… 청담동 며느리룩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이후 해외 문물에 대한 관심도는 크게 높아졌다. 먼저 면세사업을 시작하며 한국에서의 성장 가능성을 타진하던 샤넬은 1991년 10월 샤넬코리아를 설립했다. 루이뷔통코리아가 설립된 지 한 달 뒤의 일이다.

다른 주요 명품 브랜드들도 1990년대 후반까지 앞다투어 한국에 직접 진출했다. 1989년 성주인터내셔널을 통해 국내에 첫선을 보인 구치는 1998년 구치그룹코리아를 설립했다. 에르메스와 살바토레 페라가모도 1997년 한국지사를 출범시키며 본격적으로 한국에 진출했다. 프라다는 에이전트를 통하지 않고 1994년 한국지사인 IPI코리아를 설립하면서 국내 소비자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당시 국내에 진출한 명품 브랜드의 고객층은 이른바 ‘특수 계층’이었다. 외국에서 거주했거나 자주 외국을 드나들 기회가 많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다찌(무리)’라 불리는 일본인 현지처들도 무시할 수 없는 고객들이었다. 이들은 일본인 애인과 같이 와서 핸드백을 구입한 뒤 나중에 혼자 와서 현금으로 바꿔가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국내 백화점들은 명품 브랜드 잡기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1995년 어느 날 갤러리아백화점 명품팀에도 비상이 걸렸다.

“샤넬 본사 사람들이 한국에 온대. 비행기 시간 먼저 알아봐!”

당시 샤넬 패션부문은 백화점 입점에는 큰 관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명품관 직원들은 샤넬 직원들의 입국 시간을 알아내 무작정 공항으로 찾아가 만났다. 샤넬과의 첫 미팅이었다. 2년 후 1997년 샤넬은 드디어 백화점에 첫 매장을 냈다.

나름 ‘트렌드세터’라고 자부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1990년대 중반에도 명품은 대중화됐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1996년경 한 백화점이 이탈리아 브랜드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로고를 백화점 외부 벽면에 부착하면서 ‘살바토레’와 ‘페라가모’가 다른 브랜드인 줄 알고 따로 떼어 다는 해프닝이 생겼을 정도였다.

1995년 패션잡지 마리끌레르에 기자로 입사한 패션홍보대행사 APR 박효진 대표(41)는 1990년대 중반 젊은 명품 소비자들이 즐겨 찾던 아이템으로 구치 벨트, 페라가모 플랫 슈즈, 프라다의 나일론 소재 백팩 등을 꼽았다. 20대 여성들은 오피스레이디처럼 단아한 정장 차림을 한 채 학교에 갔고, 나이트클럽에도 갔다. 이후 이 정장 트렌드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이른바 ‘청담동 며느리룩’으로 이어졌다. 1999년 TV 드라마 ‘청춘의 덫’에서 인기를 끈 탤런트 심은하가 이 스타일의 대표주자로 꼽혔다.


2000년… ‘잇 백’의 시대

1999년 김윤호 우림FMG 대표(52)는 모험을 감행했다. ‘엠포리오 아르마니’ 시계 수입 판매권을 따내기로 한 것이다. 외환위기로 환율이 천정부지로 오른 상황이었다.

“코미디 프로그램 패러디에 특정 브랜드가 나온다면 그게 럭셔리의 대명사가 됐다는 뜻이에요. 그땐 ‘아르마니’가 코미디에 많이 나왔죠. 조르조와 엠포리오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도 어쨌든 아르마니는 다 안다는 거거든요.”

아르마니라는 이름을 알지만 매장에서 옷을 사기는 부담스러운 사람들이 액세서리를 살 거라 믿었다. 20만∼30만 원이면 아르마니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시계 편집매장 ‘갤러리어클락’에서 아르마니, 버버리, DKNY, 휴고보스 등을 내놓자 연예인들이 먼저 찾아왔다. 상류층은 옷을 사고, 중상층은 가방을 사고, 중산층은 시계를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올해로 18년차인 스타일리스트 한혜연 실장(42)은 2000년대 초반 서울 강남구 청담동, 압구정동을 떠올리면 똑같은 가방과 신발, 옷차림이 생각난다고 말한다. 누구나 아는 그 가방이란 뜻의 ‘잇백(it bag)’의 시대였다.

서울 강북지역에 명품관이 생긴 게 이때다. 롯데백화점 ‘에비뉴엘’이 2005년 3월 서울 중구 소공동 본점 옆에 문을 열었다. 당시 명품 브랜드 유치를 진두지휘한 인물은 신영자 이사장의 차녀인 장선윤 전 롯데백화점 상무였다. 모친이 롯데면세점 명품 브랜드 유치에 나섰다면 딸은 강북의 상징적인 명품관 오픈의 선봉장 역할을 한 셈이다.


2003년… 청담 단독매장 세계

김은수 카르티에코리아 이사(45)는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부터 시작되는 이른바 ‘청담동 명품거리’를 살리기 위한 프로젝트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거리는 1994년 당시 신세계백화점이 수입한 조르조 아르마니의 단독 매장을 열면서 주요 명품 브랜드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경쟁하는 각축장으로 자리매김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당시 아르마니 청담동 매장이 첫날부터 놀라운 매출을 올리는 걸 보면서 모두들 ‘우리나라에도 명품 패션 시장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전했다. 1996년에는 프라다가 국내 첫 직영 매장을 청담동에 열었다. 1997년에는 구치가, 2000년에는 루이뷔통이 각각 단독 매장을 열었다.

단독 매장의 활성화는 소비 시장의 성숙도와 연결지어 설명할 수 있다. 국내 소비자들의 주된 쇼핑 패턴은 아직 백화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한 브랜드에 대해 총체적으로 경험해보고 싶은 소비자들은 대형 단독 매장을 선호한다. 단독 매장을 찾는 고객은 목적구매 성향이 높고 브랜드 충성도도 강한 VIP일 확률이 높다.

2008년 청담동에 문을 연 ‘카르티에 메종’은 이런 고객을 겨냥해 고객 서비스를 강화했다. 발레파킹을 맡긴 뒤 차를 찾으면 운전대 근처에서 금색 카드 한 장을 발견하게 된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메시지와 함께 흰 꽃 한 송이가 함께 꽂혀 있어 감동을 준다.

청담동의 해외 브랜드들은 고객 서비스의 일환으로 파티도 많이 열었다. 그러나 일반 고객이나 연예인 모두 서양식의 스탠딩 파티 문화를 낯설어했다. 대개 이런 파티 때는 샴페인에 가벼운 핑거푸드를 곁들이는 정도로 요기를 하는데 참석자 중 상당수는 “배가 고프다”며 푸념을 하기도 했다.


2000년대… 곱지 않은 시선

수입 초기 단계부터 명품은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2000년대 들어서도 각종 정치적 사건과 연관돼 명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커졌다. 이 사건들이 대서특필되면서 거꾸로 대중적인 인지도를 쌓는 효과를 내기도 했다.

2002년 ‘최규선 게이트’ 때에는 검찰에 출두할 때 입었던 베르사체 슈트가 한참 화제가 됐다. 2007년 ‘신정아 사건’ 때는 변양균 전 대통령정책실장이 신 씨에게 선물했던 ‘반클리프&아펠’ 보석이 이름을 알렸다.

유명인 당사자는 구설수에 올랐지만 해당 브랜드는 조용히 웃는 경우도 속출했다. 명품 패딩으로 최근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몽클레어’가 대표적이다. 방송인 신정환 씨가 불법 원정 도박 후 귀국할 때 입어 화제가 된 데 이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손녀가 아동용 패딩을 입어 브랜드 인지도를 확실히 굳혔다.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의 부인 김윤옥 여사는 1500만 원짜리 ‘프랭크뮬러’ 시계를 찬다는 의혹을 받았다. 나중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긴 했지만 대중에게 생소했던 브랜드명 하나는 확실히 인지시켰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치인들은 2000년대 들어 옷과 가방 브랜드를 특별히 챙기기 시작했다. 고급 브랜드 제품을 걸쳤다가 자칫 ‘누리꾼 수사대’에 걸려 구설수에 오르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한 패션업체 관계자는 “페라가모 구두를 즐겨 신던 한 정치인이 선거 때가 되자 보세 신발로 바꿔 신는 것을 보았다”며 “에르메스 슈트 마니아도 정치인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바꿔 입는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2006년… 함정에 빠진 ‘된장녀’

‘들어본 적이 없는 브랜드인데…. 본사 사람들은 어디 있지?’

2006년 6월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화려한 론칭 파티가 열렸다. 수천만 원짜리 고가 시계 ‘빈센트앤코’의 국내 시장 상륙을 알리기 위한 파티였다. 시계 바이어였던 박상옥 롯데백화점 해외패션MD2팀장(40)도 파티에 참석했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 왕실에서 쓰는 시계라는데 정작 해외 본사에서 온 외국 사람은 없고, 연예인만 많았기 때문이다. 박 팀장은 “찜찜해서 백화점에서 판매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당시 명품 스타 마케팅의 공식은 이랬다. 청담동의 세련된 장소를 골라 파티를 하고, 연예인과 연예뉴스 기자를 불러 사진을 인터넷에 나돌게 하고, 럭셔리 잡지 등에 화보를 내보내고, 스타들에게 협찬해 드라마에 간접적으로 노출되도록 했다. 여기에 유럽 왕실, 전통 스토리를 더하면 곧 명품이 됐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가짜 명품 ‘빈센트앤코’는 이런 전형적인 코스를 따랐고, 잘나가는 청담동 ‘패션피플’마저 감쪽같이 속았다. 스위스에 상표등록을 하고, 중국산 부품으로 경기 시흥 공장에서 조립한 뒤 스위스로 가져갔다가 일부 상품을 다시 한국으로 보내 스위스 수입필증까지 얻어냈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 명품거리에 있는 루이뷔통 매장. 국내 명품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들자 루이뷔통은 좀더 고급스럽고 예술적인 아이템으로 소비자를 공략하고 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우림FMG 김 대표는 “당시 빈센트앤코 관계자가 시계 스케치를 보여주며 파트너가 되지 않겠냐고 찾아왔었다”며 “그 시계를 스위스 바젤 페어(세계 최대 시계 박람회)에서 본 적이 없다고 했더니 미국 뉴욕에 본사가 있다는 둥 횡설수설했다”고 회상했다.

최근에야 시계 동호회나 전문 잡지가 늘어났고 소비자들도 웬만한 브랜드의 역사까지 꿰고 있지만 당시에는 명품의 이름에 기대려는 이들이 더 많았다는 얘기다. 빈센트앤코뿐 아니라 명품 마케팅으로 사기를 친 이들이 속속 나타났다. ‘명품 소비=허영심’이란 인식이 확산되고, ‘된장녀’(소득에 비해 과한 소비를 즐기는 여성)라는 말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한때 루이뷔통의 베스트셀러인 ‘스피디 백’을 두고 길거리에서 3초면 볼 수 있다는 뜻의 ‘3초 백’이란 별칭이 붙었다. 이 가방에는 ‘명품 입문백’이란 별명도 있었다. 가격이 100만 원을 넘지 않아 신입사원이 첫 월급을 타면 사는 가방으로 인식됐던 것이다.


2013년… 명품 vs 수입 브랜드

사그라질 것 같지 않았던 한국의 명품 열기는 지난해 4분기(10∼12월)를 기점으로 한풀 꺾였다. 유통업계 자체가 최근 10년 내 유례가 없는 불황을 겪었다.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전년 대비 12∼28%씩 성장하던 명품 업계는 지난해 3.1% 성장하는 데 그쳤다.

송지혜 베인앤컴퍼니코리아 상무는 “선거 이후 경제민주화 등 정치적 이슈까지 맞물리면서 부자들의 소비심리가 위축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한 해외 패션 브랜드 사장은 “설문조사를 해보면 15년 전에는 패션의 선택 기준 1위가 브랜드였다면 최근엔 디자인”이라며 “브랜드 네임으로 승부를 거는 시대는 지났다”고 평가했다. ‘물건 대신 경험을 사는 젊은층이 늘었다’는 등의 해석도 잇따르고 있다.

성적표를 꼼꼼히 따져보면 업체별로 명암이 갈렸다. 송 상무는 “명품 중에서도 지나치게 대중화돼 개성을 잃은 엔트리급 또는 중간급 브랜드들의 타격이 크고 ‘타임리스 럭셔리’로 불리는 최고급 브랜드들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고 전한다.

김 대표는 소비자들이 진짜 명품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시기라고 설명한다. 그는 2011년 고급 시계의 정점이라고 불리는 ‘파테크 필리프’의 강남 딜러가 됐다. 파테크 필리프는 한 해 생산 수량이 5만 개 안팎이며 중국에도 매장이 하나밖에 없을 정도로 까다롭게 매장을 내준다. 김 대표는 “최근 명품 시장이 안 좋다고 하는 것은 대중이 명품이라고 인식하는 몇몇 브랜드의 매출만 보고 있기 때문”이라며 “파테크 필리프는 여전히 물량이 없어 기다리는 고객이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롯데백화점은 2002년 생긴 ‘해외명품팀’의 이름을 2011년 해외패션팀으로 바꿨다. 이철우 당시 롯데백화점 사장이 ‘수입 브랜드가 어떻게 전부 명품이냐’며 이름을 바꾸라고 지시한 것이다. 정부도 지난해 말부터 공식 문서에서 명품이라는 말을 쓰지 않기로 했다. 동아일보를 비롯한 일부 언론도 올해부터 명품 대신 ‘해외 유명 브랜드’로 바꿔 쓰고 있다.

롯데백화점 박 팀장은 “예전에는 유명한 브랜드를 유치하기만 하면 됐지만 요즘에는 남보다 빨리 새로운 브랜드를 소개해야 소비자들이 인정해준다”고 말했다. “요즘 진짜 멋쟁이들은 악어가죽 백을 산다면 ‘데비 크로웰’을 사겠죠. 다들 아는 것보다 새롭고 독창적이라서 차별화될 수 있는 것을 찾아다니니까요.”(한혜연 스타일리스트)


한국인과 럭셔리

최근 발표된 컨설팅업체 베인앤컴퍼니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세계 8위 규모(83억 유로·약 12조 원)의 명품 시장이다. 인구 대비로 보나, 확산 속도로 보나 명품에 대한 선호도가 가장 높은 축에 속한다.

현대적 명품 산업은 경제발전과 맞물려 발전해 왔다. 부를 축적한 사업가들이나 부르주아 계층은 다른 사람과 차별화하기 위해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가격대의 제품으로 스스로를 치장했다. 김상훈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경기가 하향 곡선을 그릴 때 오히려 이득을 보는 계층이 생기고, 이때 생긴 신분의 격차를 드러내 놓고 보여줄 수 있는 수단으로 명품이 활용됐다”고 해석했다.

1998년 외환위기 직후 환율과 금리가 올라가면서 금융자본 계층이 이득을 봤고, 2000년대 이후엔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기회를 잡게 된 사람들이 생겼다. 실제로 이런 시기에 국내 명품 시장은 큰 폭으로 성장했다.

특히 한국의 명품 시장은 일본과 비교해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베인앤컴퍼니코리아 송 상무는 “일본에서 한국, 중국으로 이어지는 아시아 명품 시장의 성장세는 마치 ‘데자뷔’를 보는 듯 비슷한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1960, 70년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 뒤 일본의 신흥 중산층은 스스로를 치장하는 방식으로 부를 과시했다. ‘럭셔리, 그 유혹과 사치의 비밀’을 쓴 뉴스위크 패션담당 기자 출신의 칼럼니스트 데이나 토머스는 이를 “인구밀도가 높은 섬나라 일본에선 다른 나라처럼 넓은 저택 같은 부동산을 통해 부를 과시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인구밀도나 주거환경이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한국도 비슷한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다.

여기에 한국인 특유의 기질적 속성이 맞물리면서 명품 시장은 보다 빨리 불을 지폈다. 김 교수는 “한국 소비자들은 유럽 등 외국에 비해 비교 소비를 많이 한다는 점이 독특하다”고 말했다. 모방 욕구가 강하고, 소셜네트워크와 입소문 등으로 서로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주위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이다.

결혼과 출산이 늦어지면서 ‘골드미스’ ‘골드미스터’가 늘어나는 것도 여전히 명품 시장의 동력으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 역시 1980년대 초에서 중반까지 연 3.7%씩 경제가 성장한 호황기에 ‘기생적 독신자(Parasite Singles)’라고 부르는 신종 사회계층을 낳은 것이 명품 시장의 큰 동력이 됐다. 대학 졸업 후 전문직 또는 보수가 많은 회사원으로 종사하면서 부모와 함께 사는 25∼34세의 미혼 여성들이 가처분 소득을 명품 쇼핑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최근 성년의 날을 맞아 디큐브백화점이 20대 여대생 346명을 대상으로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을 물은 결과 ‘명품 가방’이 32%로 1위를 차지했다. 젊은층이 명품 소비 피라미드의 말단으로 계속 유입되는 한 명품 산업의 빛이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흘러나오는 대목이다.

에르메스가 광고 캠페인을 통해 전달했던 브랜드 철학은 ‘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모든 것은 변하지만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이다. 말장난 같은 캐치프레이즈 속에 100년 이상 전통을 가진 기업만이 가질 수 있는 백전노장의 여유가 느껴진다.

지금 세계의 명품 기업들이 주목하는 것도 이것이다. 브랜드의 본질을 지키며 혁신을 하는 것…. 가장 예민한 한국 고객들이 이들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전 세계 명품업계가 주목하고 있다.

김현진·김현수 기자 br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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