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00원에 한 편’ 상업연극 득세… 제 살 깎아먹기 우려도

김기윤 기자

입력 2019-10-14 03:00:00 수정 2019-10-14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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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 점령한 ‘저가 마케팅’ 연극

12일 오후 대학로 한 소극장 공연을 앞두고 관객들이 예매 티켓 교환, 티켓 현장 구매를 위해 길게 줄을 섰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저가 티켓 마케팅을 앞세운 ‘상업연극’이 대학로를 점령하고 있다. 상업연극은 오락이나 흥행에 초점을 맞춘 작품으로, 예술성에 치중한 ‘순수연극’과 구분하는 개념. 그런데 인건비마저 충당하기 힘든 요즘 세태에, 그나마 이윤을 남기며 연극판을 버티는 작품은 대다수가 상업연극이다. 전문가들은 최근 작품 수준도 비교적 높아졌고, 저렴하게 즐길 수 있다는 걸 장점으로 꼽는다. 하지만 과도한 저가경쟁과 호객행위가 연극계의 질적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없지 않다.


○ 상업연극 전성시대… 퀄리티도 나쁘지 않아

12일 서울 대학로 한 소극장. 수년째 ‘오픈런’(끝나는 날짜 지정 없이 이어지는 공연) 코미디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이날 100석 규모인 객석은 절반이 좀 못 미치는 자리만 채워졌다. 공연이 임박하자 일부 극장 관계자가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행인들에게 “싸게 드릴게. 진짜 재밌어요”라며 파격적인 저가 티켓을 제안했다.


막이 오르자 ‘분위기 메이커’가 무대에 올라 박수와 함성을 유도했다. 관객을 중간 중간 무대로 불러내 극에 참여시킬 때도 있다. 극의 짜임새는 살짝 엉성했지만 그래도 진정성 있는 배우들의 열연에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리거나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한 남성은 “저렴한 비용으로 연극을 보다 보니 웬만한 ‘흠’은 넘어가주게 되더라”고 했다.

또 다른 소극장에서는 선정적 ‘성인 코미디’를 무대에 올렸다. 꽤나 수위 높은 대사가 오가는데 커플로 보이는 관객이 많다. 배우들은 짓궂은 질문으로 관객들을 당혹시키기도 했다. 역시 관객들의 만족도는 나쁘지 않았다.

상업연극의 인기몰이가 물론 최근에 벌어진 기현상은 아니다. 사실 비용을 덜 들이되 싼 티켓 값으로 관객을 유혹하는 방식은 이미 대학로의 오랜 관행. 입장료를 대폭 깎더라도 수익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공연계 관계자는 “잘나가는 공연은 지방공연을 포함해 한 달에만 수천만 원대의 매출을 올리기도 한다. 정부나 예술계 지원 없이도 이미 독자적 생존법을 갖춘 작품이 많다”고 했다.

상업연극의 장르 다변화도 한몫했다. 코미디, 공포나 멜로, 성인물 등으로 세분화했다. 관객 참여를 유도하고, 퀴즈를 통해 초대권이나 상품도 나눠준다. 한 연극계 원로는 “과거엔 상업연극을 ‘뒷골목 연극’이라 폄하하기도 했다”며 “요즘은 딱히 비난하기 어려울 정도로 배우 연기나 짜임새의 수준이 올라와 놀랐다”고 했다.


○ 과도 경쟁으로 ‘제 살 깎아먹기’가 되진 말아야


12일 서울 종로구 혜화역 인근에 설치된 티켓 할인판매용 부스. 티켓 예매를 하지 않고 대학로를 찾은 사람들에게 공연 중인 연극 수십 편을 시간, 장르별로 추천해 판매한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당연히 이런 흐름이 장기적으로 옳다고 볼 순 없다. 저가 티켓 마케팅은 결국 ‘제 살 깎아먹기’다. 한 연출가는 “‘연극=저가’라는 인식이 고착화되면 연극계의 전반적 질적 저하를 불러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현재 소셜커머스 사이트에는 공연 티켓이 4900원인 작품도 여럿이며, 1만 원대 이하 티켓도 많다. 평일 평균 할인율은 70∼80%에 이른다. 한 극단 관계자는 “대다수 관객이 소셜커머스를 통해 티켓을 구입하기 때문에 가격 경쟁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털어놨다. 몇몇 극장 대표가 ‘최저 가격선’을 논의하기도 했으나 공염불이 됐다.

만연한 호객행위도 문제다. 이날 대학로 인근에선 잠깐 서 있는 동안 티켓 호객꾼 7, 8명이 말을 걸어왔다. “저한테 오시면 더 싸게 드려요. 제가 수당도 받으니 꼭 다시 와 주세요”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이은경 연극평론가는 “상업성에 치중한 작품들을 무조건으로 비판할 수도 없고, 소셜커머스 경쟁을 막을 방법도 없다”면서도 “다만 배우에게 시급을 지급하며 공장에서 작품을 찍어내듯 만드는 상업공연이 기존 관객층마저 떠나보내지 않도록 최소한의 예술성, 대중성은 담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는 “연극적 품위를 고민하되 가격 경쟁을 위해 싼 좌석만으로 관객을 모으는 시장 교란 행위는 지양할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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