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차량 입찰 ‘제살 깎아먹기’ 논란… “협상에 의한 입찰 방식으로 바꿔야”

태현지 기자

입력 2024-03-25 03:00 수정 2024-03-2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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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가 낙찰제도 변별력 도마
업체 연쇄적 납기 지연 사태
값싼 해외 부품 사용 문제로, 유지보수 비용 추가 발생
“협상에 의한 계약으로 정착을”


1호선 전동차 화재. 인천소방본부 제공

철도차량 산업은 지방 발전을 견인하는 교통 인프라 구축의 근간이 되고 최근엔 화석연료를 대체할 수 있는 배터리, 수소 등 친환경 에너지가 활용되면서 지속가능한 청정에너지 산업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렇듯 철도는 국내 산업계의 지속 성장·발전을 견인할 핵심 요소다.

그러나 국내 철도차량 산업의 기술 발전에 비해 산업에 대한 인식과 관련 제도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발전을 저해하는 제도와 관습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국내의 후진적인 철도차량 구매 절차는 저가 가격경쟁을 부추겨 국민의 안전과 철도 산업 발전을 심각하게 저해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올해 고속전철을 비롯한 전동차와 트램 등 다양한 철도차량에 2조 원이 넘는 국내 구매 물량을 시작으로 2028년까지 6조 원 이상의 대형 시장이 준비되고 있다. 이 시점에서 그동안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고 세금을 낭비해 큰 사회문제가 된 최저가 낙찰 제도가 다시 부각되고 있다. 현행 제도를 유지할지 혹은 철도 관계자 및 여론의 지적을 받아들여 선진국과 같은 ‘협상에 의한 입찰 제도’로 개선할지 철도차량 구매 제도의 변화 여부가 크게 주목받고 있다.


‘가격 우선’으로 저품질 철도차량 양산 비판

현재 국내 철도차량의 입찰은 ‘2단계 기술·가격 분리 동시 경쟁입찰’ 방식이다. 입찰일에 기술 제안서를 밀봉된 가격과 함께 제출한 뒤 ‘평가기준’에 따른 기술평가를 85점 이상으로 통과한 복수의 입찰자만 따로 모여 가격을 개봉해 최저가 제시 업체가 최종 낙찰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입찰자의 계약 이행 능력을 제대로 검증해야 할 기술평가가 입찰자 모두 통과하는 변별력을 잃은 형식적인 평가가 됐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이로 인해 제작 능력이나 계약 이행 능력이 부족한 업체라도 최저가 덤핑 투찰로 낙찰되는 상황이다. ‘기술평가 기준’이 본래의 역할을 못하고 단지 통과의례가 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계약 이행 능력이나 자격이 없는 입찰자를 걸러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발주 기관이 입찰 공고에서 제시한 ‘구매요청서(RFP)’로 요구하는 기술 수준에 적합한지, 원하는 기간 내에 공급할 수 있는지, 계약 이행 능력을 갖췄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판단하는 과정이 부실하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는다. 이 평가가 잘못되면 최종 계약한 차량이 정상적인 품질 수준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기한 내 납품을 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철도를 이용하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직결된 문제다. 또한 노후된 철도차량의 계속된 운행으로 인해 발생하는 잦은 고장, 불편 등 사회적인 비용까지도 감당해야 한다. 비용과 시간의 손실뿐만 아니라 철도차량의 생애주기가 뒤틀리고 불필요한 유지보수 비용이 추가로 발생하는 심각한 결과가 뒤따른다.

따라서 평가기준은 발주자의 관점에서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도록 다양한 요소를 반영해 상세히 만들어져야 하며,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입찰자의 계약 이행 가능성을 엄격히 평가해야 한다. 하지만 철도 업계 관계자들은 현재 철도차량 구매 입찰에서 적용하는 평가기준은 엉성하고 주관적이어서 입찰자의 완전한 계약 이행 능력을 판단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불과 몇 시간 동안 밀실 평가로 판단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 보니 기술평가는 정작 평가해야 할 핵심은 빠지고 부적격자만 제외하면 그냥 통과되는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현행 철도차량 구매 입찰 방식은 2000년대 이후 본격 적용됐으나 계약 이행 능력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업체들이 2018년부터 국내 철도차량 입찰에 신규로 참여하면서 문제가 됐다. 철도차량에 대한 기술 능력은 물론이고 생산을 위한 제작 공장과 생산 인력의 적정성 등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최저가를 무기로 수주했지만 기술 부족과 납품 지연 문제가 지속적으로 지적돼왔다.

철도차량 제작 능력 등의 검증은 철도안전법에 따라 계약 이후에 실시하는 철도차량 제작자인증 제도와 시험평가 제도를 통과해야 비로소 인정하는 것이며 이후 실제 운행 노선에서 영업 운전을 통해 제작 능력이 최종적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계약 이전 평가 단계에서 제작 실적을 확인하고 제작 공장의 생산 여력 등을 일일이 확인하는 방법 말고는 기술 능력이나 생산 능력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변별력 없는 기술평가를 통과한 일부 업체는 기술 및 생산 능력 부족 등 총체적인 문제를 유발하면서 연쇄적인 납기 지연 사태가 발생했고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19일 전국철도노동조합 서울지방본부는 이와 관련한 성명서를 내고 “지난해 여름 우진산전이 제작한 새 전동차 41대가 영업 운전에 투입되면서부터 승무원의 불안은 끊이지 않았다”고 전했다. 노조는 이어 “2023년 11월 7대의 열차에서 보조전원장치(SIV) 화재와 고장이 발생했다”며 “이달 9일 온양온천역 SIV 화재를 시작으로 일주일도 채 되지 않는 기간에 천안, 평택, 인천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열차 화재와 부품 폭발이 10여 차례 잇달았다”라고 전했다. 또 “철도공사는 승객과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41대의 전동차 도입분 영업 운전 투입을 즉각 중단하고 문제 차량 도입 경위와 책임 소재를 밝혀야 한다”고 요구하며 “국토부와 철도공사는 철도차량 최저입찰제 등 최근 철도차량의 품질 저하를 야기하고 있는 제도적, 구조적 원인을 성찰하고 안전, 노동조건, 서비스 수준을 확보할 수 있는 철도차량 설계 및 납품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지난 13일 인천 도원역과 인천역에서 일어났던 전동차 화재사고는 철도공사가 우진산전과 최저가로 계약해 2023년 8월부터 영업 운전에 투입한 전동차에서 발생했다. 이처럼 국내 도입 전동차는 발주자인 철도공사의 설계승인 및 제작관리하에서 철도안전법에 따른 국토교통부의 제작자인증과 시험평가를 통과해야 하는 2중, 3중의 철저한 관리·감독을 거쳐 납품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업 운전에서 이달만 20여 차례의 화재사고 등이 연이어 발생했다.

이는 철도차량 제작 능력과 이를 검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확인하는 동시에 변별력 없는 평가에 의한 최저가 입찰의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울러 저가의 저품질 부품을 사용해도 눈앞의 인증만 통과하면 된다는 안일한 태도는 실제 영업 운전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국민의 안전하고 쾌적한 철도차량 이용을 보장하기 위해 정부가 도입한 철도안전법의 제도들이 최저가 입찰을 유도하는 구매 제도와 잘못된 관행으로 시대에 역행하고 있다. 이에 최저가 입찰 제도로 값싼 제품을 양산해 철도차량의 품질 저하를 일으키는 구조적인 원인을 바로잡고 제대로 된 철도차량 설계와 납품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사회 곳곳에서 더 커지고 있다.

한편 철도공사는 최근 발생한 화재사고의 원인이 이상전압으로 보조전원장치 내부의 퓨즈 소손이 발생한 것이며 ‘안전측 동작(고장 시 장비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동작)’의 일환이라고 해명했다. 새로 투입된 전동차와는 무관하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철도업계 관계자는 “보호동작이 새로 투입된 전동차에서만 유독 집중되는 이유 등을 설명하지 않고 해당 사고를 덮으려고 발뺌하는 격”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납기 지연에 의한 문제는 현재진행형


납기 지연이 일어날 경우 채무자(계약자)가 계약 기간 내에 계약상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을 때 채권자(발주자)에게 지불하는 지체상금이 발생하는데 철도차량 납품 지연으로 인한 지체상금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A사 2525억 원, B사 1786억 원, C사 189억 원 등 총 4500억 원에 달한다. 한 철도차량 관계자는 “도시철도보다 훨씬 고도의 기술력과 제작 능력을 필요로 하는 고속전철에서도 이런 구매 입찰 제도가 적용된다면 안전에 심각한 문제가 초래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새로운 동력 분산형 고속전철의 상용화 과정에서 소음 저감을 위해 전면 재설계를 선택한 C사의 경우를 제외하고 A사와 B사는 국내에서는 기술적 완성도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전동차의 설계·제작·납품의 모든 계약 이행 과정에서 기술력 부족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으며 납기 지연을 발생시키고 있다.

계약 이행이 지연됨에도 불구하고 발주기관에서는 추가 계약을 계속 허용해주거나 사업이 중단되는 것을 우려해 지연되고 있는 사업에 최대 50%를 상회하는 선금을 협력업체 지원 등의 명목으로 해당 계약자에 지급하고 있다.

한편 승인 과정에서 저가의 중국 제품 사용을 허용하거나 묵인해 문제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부실 계약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스스로 부족한 기술을 조언하고 지원해주는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계약에 개입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기도 하는데 이는 심각한 수준의 입찰 질서 훼손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는 문제다. 나아가 지식재산권 침해 등 국제 분쟁으로 번질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계약 이행이 지연되면서 발생하는 비용적, 시간적 손실도 무시할 수 없다. 납품이 지연되면서 낡은 전동차를 정상 운영하는 데 드는 유지보수 비용과 선금으로 투입된 대금이 정상적인 생산 활동에 쓰이지 못하면서 발생하는 기회손실 비용, 여기에 저가 입찰을 핑계로 질 낮은 제품을 사용해 생애주기 유지 비용이 증가하는 문제도 발생한다.

전동차가 필요한 시점에 교체되지 못하면 사고 발생의 위험도 떠안을 수밖에 없다. 국민의 세금으로 유지되는 철도가 국민에게 불편을 주거나 불안한 교통수단이 될 수 있다. 단순히 초기 구매 비용을 낮추려 현재의 입찰 제도를 고수해 수반되는 위험성과 기회손실 비용은 고스란히 국민의 몫으로 남게 된다.

업계에선 어렵게 쌓아온 철도차량 산업의 기술 발전 생태계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점도 최저가 입찰 제도의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최저가 경쟁에서 값싼 해외 부품을 사용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수주 업체는 저가 낙찰로 인한 손실을 저가의 해외 부품 사용, 생산 인력의 재하청 등으로 만회하고 있어 가뜩이나 내수시장 의존도가 큰 한국 철도차량 부품 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저가 입찰로 인해 제작사뿐만 아니라 철도차량 부품사에도 부담이 전가되면서 영세한 부품 제작사는 줄도산을 한다는 것이다. 중국산 부품 등 저가 경쟁에 밀려 철도차량 부품의 무역수지 적자도 심화되는 추세다. 이런 상황에서 제작사가 계약금 내에서 철도차량을 제작하기 위해 저가의 해외 부품을 사용하면서 결과적으로 국내 부품업체를 도산시키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관행들이 결국엔 제작 및 납기 지연, 품질 불량으로 연결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해외선 기술 중심 평가로 전환

국내 철도차량 구매 입찰 제도로 다양한 문제가 불거지는 동안 해외에서는 기술 중심의 입찰제도로 진화하고 있다. 입찰자가 신기술을 제안해 채택하면 가점을 주는 방식으로 기술력뿐만 아니라 친환경 분야까지 확대 평가해 제작자의 기술 발전을 적극적으로 유도한다.

철도차량 관계자들은 다양한 문제점의 원인이 되는 국내 입찰 방식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해외 철도차량 구매에 널리 사용되고 있는 ‘협상에 의한 입찰’ 방식 도입을 고려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 시행령 43조에 따르면 협상에 의한 입찰은 다수의 공급자로부터 제안서를 받아 평가한 후 협상 절차를 통해 계약을 체결하는 것을 의미하며 기술평가(80점)와 입찰가격 평가(20점)를 합산해 높은 점수순으로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 후 협상을 시행하는 방식이다.

공기업 실무자 입장에서도 애로사항은 있다. 한정된 예산으로 경쟁을 통해 원하는 철도차량을 구매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며 평가 기준을 너무 어렵게 하면 상대방 입찰자의 민원이나 감사로 힘들다는 등 다양한 이유를 들어 현행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철도업계 관계자는 “입찰 관계자들이 감사와 민원 걱정 때문에 대량의 인명을 이동시키는 철도차량 구매 행위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근본 목적을 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합리적인 유지보수 비용으로 30여 년의 수명주기 동안 충분한 성능을 발휘하도록 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의무 역시 잊어버린 채로 최저가 입찰에만 매달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다 보니 국내 철도차량 구매 예산은 OECD 국가 기준 최하위권이다. 발주기관의 최저가 경쟁 입찰로 정상적인 시장가격과는 멀어진 상황이다. 과거에 구매한 거래가격(거래 실례가)을 기준으로 물가 인상 등의 계수조정만으로 새로운 예산을 편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상적인 차량 구매를 위해서는 원가 전문가를 통해 예산에 대한 적절성을 살펴보고 정당한 예산을 배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아울러 제기된다.

또한 입찰 관계자가 각종 민원이나 불필요한 개입에서 벗어나 소신껏 예산을 집행하도록 철도차량 구매 입찰의 목적에 대한 원칙을 구체적으로 정하고 제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철도차량을 모든 업체에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가장 싼 값에 구매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입찰자를 선정하려는 것인지에 대한 원칙을 분명히 정하고 이를 반드시 지키도록 평가기준을 포함해 제도로서 확립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최근 K-방산으로 불리며 성공적으로 해외시장을 점령해 가고 있는 우리나라 방위산업 성공 이면에는 기술 발전에 대한 관계자의 피땀 어린 노력과 함께 이를 뒷받침하는 공정하고 투명한 입찰 평가 제도가 뒷받침돼 있다. 방산업체들이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하는 제도적 여건을 만들어 주고 있는 만큼 철도차량 산업에서도 방위산업의 ‘무기제안서 평가지침’과 실제 구매 평가기준을 참고할 수도 있다.

한 철도업계 관계자는 “해외 철도 선진국들이 오랜 기간 시행착오를 거치고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의 ‘협상에 의한 계약’과 같은 철도차량 구매 방식을 정착시켰다. 반면 별다른 진입 장벽이 없는데도 선진국 업체들은 우리나라의 철도차량 최저가 구매 입찰에 참여하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됐다. 기술 중심의 계약 이행 능력을 중요시하는 해외 철도차량 제작업체에 최저가 입찰은 비용 손실과 함께 낙후된 기술이나 저가 부품의 사용으로 세계시장에서 신뢰를 잃게 돼 평판의 손실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 최저가 입찰 경쟁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양질의 철도차량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매하기 위한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태현지 기자 nadi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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