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은 맥주잔을 왜 납작하게 그렸을까?[영감 한 스푼]
김민 기자
입력 2023-09-22 09:00
폴 고갱, ‘창문 앞 과일 그릇과 맥주잔’ 1890년경, 캔버스에 유화, 50.8 x 61.6 cm, 내셔널갤러리 런던 소장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9월 20일을 기준으로 이 전시를 30만 명 넘는 분들이 관람했다고 합니다. 10월 9일까지 전시가 계속되니 이제 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그동안 영감한스푼에서는 총 4개의 작품을 소개했습니다.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목록을 참고해주세요.
이번엔 인상주의 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작품, 폴 고갱의 정물화를 감상해보겠습니다.
수수께끼 가득한 그림
고갱이 프랑스 파리를 떠나 브리타니에 머물던 시절 그렸던 이 정물은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폴 고갱, ‘창문 앞 과일 그릇과 맥주잔’ 1890년경, 캔버스에 유화, 50.8 x 61.6 cm, 내셔널갤러리 런던 소장.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게다가 빛은 하나도 비추지 않아서 마치 종이를 오려서 세워 놓은 듯 납작하게 그려져 있죠. 그 옆 칼 역시 기울어진 각도가 아니었다면, 입체감을 전혀 느낄 수 없도록 색이 칠해져 있습니다.
덕분에 이 그림은 과일이 있는 부분은 앞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보이지만, 칼과 잔이 놓인 부분은 갑자기 푹 꺼져서 이상하고 낯선 느낌을 자아냅니다.
게다가 이 모든 것들이 놓여 있는 테이블 바닥을 인식하게 되면 이 그림은 더욱 이상해집니다. 맥주잔은 납작해서 같은 눈높이에서 본 모양인데, 테이블은 옆면이 전혀 보이지 않고 상판만 가득해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입니다.
만약 이 그림이 사진이라면 낭떠러지처럼 그려진 상판에 놓인 모든 것들은 아래로 흘러내려야만 할 것입니다.
폴 고갱, ‘창문 앞 과일 그릇과 맥주잔’ 1890년경, 캔버스에 유화, 50.8 x 61.6 cm, 내셔널갤러리 런던 소장.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우선 이렇게 테이블 뒤편에 바로 창이 있다면, 테이블 위에 놓인 사물들은 역광을 받고 있겠죠. 맥주잔처럼 시커멓게 칠해져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사과는 오른쪽 위에서 빛을 받아 동글동글한 양감을 마음껏 뽐내고 있습니다.
마치 ‘빛이 어디에서 오든 난 이 각도가 제일 예뻐’하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죠.
또 고갱이 이 정물을 그린 지역은 시골 마을인데, 창밖 풍경은 집이 아주 빽빽하게 들어찬 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고갱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었던 걸까요?
이 질문에 답을 찾으려면 아래의 작품을 꼭 봐야 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세잔
폴 세잔, ‘과일 접시가 있는 정물’(1879-80), 뉴욕 현대미술관(MoMA) 소장. 사진 출처: 위키데이터고갱 정물과 공통점을 찾자면 비스듬히 놓여 시선을 앞으로 잡아당기는 나이프, 납작해 벽지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유리잔이 가장 먼저 눈에 띕니다. 여기에 뒤편의 벽지를 마치 그림의 액자처럼 활용한 것도 재치 있죠.
고갱은 주식 중개인으로 일할 무렵인 1880년대 세잔의 작품 6점을 구입합니다. 그중 하나가 위 정물이었는데, 이 작품에 대해 ‘최고의 보석,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작품’이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고갱은 1883년 이혼을 하면서 갖고 있던 많은 작품을 팔았는데, 이 작품만큼은 계속해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식 중개인으로서의 삶을 버리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브리타니로 떠난 뒤 우리가 지금 만나는 정물을 그리게 된 것이죠. 고갱의 또 다른 초상화에서도 이 정물의 모습은 발견됩니다.
폴 고갱, ‘세잔의 정물 앞 여인’(1890), 미국 시카고미술관 소장. 사진 출처: 시카고미술관모네를 비롯한 인상주의 작가들은 우리의 눈을 ‘빛을 받아들이는 기관’으로 보고, 빛의 변화에 따라 바뀌는 시각적 색채와 이미지를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죠.
여기서 더 나아가 세잔은 우리의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보았습니다. 빛이 역광으로 비치더라도 내 마음속 사과는 오른쪽 위가 반짝이는 예쁜 사과일 수 있다는 것. 유리잔을 테이블 위에 놓고 보면 동그란 윗부분만 보일지라도, 내 마음속에서는 옆선이 선명하게 보이는 납작한 도형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
이런 세잔의 과감하게 내디딘 걸음을 고갱은 마음으로 느끼고 있었기에, 작품을 진심으로 즐기고 또 더 나아가 단조롭게 되풀이되는 일상을 뒤로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열어젖힐 수 있었습니다.
예전 어느 영화에서 첼로 거장 파블로 카살스가 이런 말을 했다는 일화가 나옵니다. 자신이 무능력하다고 생각하는 젊은 연주자가 “내가 학생일 때 당신 앞에서 연주를 했고, 칭찬까지 해주었다”고 말하고는, 카살스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그때 왜 그런 무책임한 말을 했느냐”고 항의합니다.
그러자 카살스는 곧바로 오래전 젊은이의 연주를 재현하며 “당신의 이 부분이 좋았다는 걸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며 “나는 작은 것에서도 감동과 기쁨을 느낄 수 있다.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이상하게 놓인 나이프, 테이블 아래 시커먼 선, 납작한 맥주잔… 그림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는 것은 이런 사소한 것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사소하고 이상해 보여도 마음의 문을 열고 보면 그곳에서 무한한 감동과 기쁨이 쏟아져나올 수 있으니까요.
고갱의 납작한 맥주잔에서 오늘은 그런 즐거움을 느껴보는 것 어떨까요?
※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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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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