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개발 26년만에 FDA 승인… 최태원 ‘딥체인지 리더십’ 결실

퍼래모스=허동준 기자

입력 2020-01-13 03:00:00 수정 2020-01-13 06: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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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100년을 준비합니다/다음 100년 키우는 재계 뉴 리더]
<3> 변화로 도약하는 ‘뉴 SK’


조정우 SK바이오팜 대표이사(오른쪽)가 지난해 11월 12일(현지 시간)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독자 개발 신약 ‘엑스코프리’의 시판 허가 승인 소식을 들은 직후 두 팔 벌려 환호하고 있다. SK바이오팜 제공
“우리가 해냈다(We Did It)!”

지난해 11월 21일 오후 4시(현지 시간) 미국 뉴저지주 퍼래머스에 위치한 SK바이오팜의 미국법인 SK라이프사이언스. 조정우 SK바이오팜 대표이사(사장)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SK바이오팜의 뇌전증 신약 ‘엑스코프리’(성분명: 세노바메이트)가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시판 허가를 받은 순간이었다. SK그룹이 1993년 신약 개발 사업에 뛰어든 지 26년 만, 세노바메이트가 FDA의 임상승인계획(IND)을 통과한 지 14년 만이었다. 한국 기업이 해외 기업의 도움 없이 신약 후보물질 발굴부터 FDA 허가까지 독자적으로 이뤄낸 것으로는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해 12월 미국법인에서 만난 조 사장은 “인생에서 가장 긴 하루였고 가장 잊을 수 없는 날”이라고 회상했다. 평소 FDA와 논의가 원활히 진행됐지만 허가 통지가 오는 그날은 유독 연락이 늦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내 ‘신약 허가 승인’ e메일이 도착하자 미국 법인 직원들의 탄성이 터졌고, 일부는 감격의 눈물을 보였다. 한국 시각 오전 6시경 조 사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수고했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연간 40여 건에 불과한 FDA 승인의 좁은 문을 돌파한 성과를 온 직원이 함께 누린 ‘최고의 날’이었다.



○ 결정적 순간마다 ‘OK’ 리더십

“이∼만큼 가져갈 수 있는 것과 요만큼 가져갈 수 있는 것 중 뭘 하실래요?”

조 사장은 기자가 신약 개발을 독자적으로 한 이유를 묻자 이렇게 되물었다. 그는 엑스코프리의 임상 1상이 한창 진행 중이던 2008년 글로벌 임상을 독자적으로 진행하고 마케팅과 영업도 직접 하겠다는 전략을 제시해 주목을 받았다. 신약 개발의 성공 확률은 낮지만 반대로 독자 개발에 성공하면 기술 수출로 얻는 금액의 10∼20배를 벌어들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국내 제약업계에선 1조 원 이상 드는 비용과 10%도 채 되지 않는 성공 확률 때문에 글로벌 임상은 글로벌 제약사에 맡기는 게 일반적이다.

SK바이오팜의 모험 뒤에는 최 회장의 지원이 있었다. 최 회장은 2002년 “2030년 이후 바이오 사업을 그룹의 중심축 중 하나로 세운다”는 목표를 제시했고 2007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이후에도 신약 개발 조직은 지주회사 직속으로 뒀다. 일부에서 ‘성공 확률은 낮은데 돈만 들어간다’고 지적했지만 꾸준한 개발을 독려했다. 2008년 존슨앤드존슨에 기술 수출한 ‘카리스바메이트’가 신약 허가의 문턱 앞에서 고배를 마셨을 때도 최 회장은 “그래도 신약 개발은 고(Go)”를 외쳤다.

특별한 수익이 없는 오랜 기다림의 시간 동안 SK바이오팜은 글로벌 제약사 존슨앤드존스, UCB 등에서 핵심 인력들을 영입하며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이들은 FDA 승인의 주역이 되었고 최근에는 신약 판매 조직의 주축이 되고 있다. 올해에도 110명을 현지에서 추가 채용했다. 실제로 현장에서 본 미국법인은 미국 회사라는 생각이 들만큼 한국인보다 현지 채용 인력들이 눈에 띄었다.

조 사장은 “지주회사 직속으로 제대로 그룹 차원의 지원을 받았기에 신약 개발이 순탄히 진행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 생존 위한 변화와 혁신, 딥체인지

재계에서는 SK의 DNA를 ‘변화’로 본다. 섬유로 시작해 에너지화학, 통신, 반도체에 이어 바이오, 모빌리티, 인공지능(AI)까지 끊임없이 사업의 중심축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약의 계기로 꼽히는 2012년 하이닉스 인수부터 최근의 신약 개발 성과까지 SK경영관리체계(SKMS)에 ‘변화’ 정신이 뿌리내린 덕이란 분석이 나온다.

최 회장은 1998년 9월 SK㈜ 회장에 취임할 당시 “SK가 혁신적인 변화를 할 것인지(딥체인지·Deep Change), 천천히 사라질 것인지(슬로 데스·Slow Death) 선택의 갈림길에 놓였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SK가 실질적으로 ‘사업구조 혁신을 넘어 조직과 문화 전반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딥체인지’를 내세운 것은 2016년부터다. 최 회장은 2년여 경영 공백 후 2016년 SK㈜ 대표이사로의 복귀를 본격화하자마자 “변화가 없다면 서든 데스(Sudden Death·갑작스러운 몰락)밖에 없다”며 딥체인지가 선택이 아닌 생존의 필수 요건임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그해 말 인사도 파격이었다. SK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에 당시 56세이던 조대식 SK㈜ 사장을 선임하는 등 50대 최고경영자(CEO) 주축의 뉴리더십 구축에 나섰다. SK텔레콤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 석사 출신의 1985년생 김지원 상무를 영입해 화제를 모았다. 영입 당시 31세로 SK 최연소 임원이었다. 해마다 임원 인사에서는 1970년대생 임원들의 약진이 이어지고 있다.

딥체인지를 앞세운 SK의 뉴리더십은 그룹을 미래 산업으로 이끄는 중이다. SK바이오팜을 중심으로 한 바이오뿐 아니라 SK이노베이션(전기자동차 배터리), SK텔레콤(AI), SK하이닉스(반도체) 등은 모빌리티와 AI 기업으로 변신 중이다.

최 회장은 지난해 SK텔레콤에 “AI 기업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도록 텔레콤이란 단어가 사명에서 제외돼야 한다”고 주문하기도 했다. 이어 박정호 SK텔레콤 사장은 최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정보기술(IT) 전시회 ‘CES 2020’에서 “비(非)통신 사업 매출 비중이 곧 50%까지 갈 것이다. 회사 이름에서 텔레콤을 떼겠다”며 AI 중심 기업으로의 도약을 선언했다.


▼ “환자 행복이 목표… 변화 의지가 신약개발 성공 비결” ▼

미국법인 임원들이 본 ‘뉴 SK’… “포기 없이 이뤄내는 집념이 강점”
해외까지 뉴 SK 경영철학 확산

“궁극적인 목표는 환자의 행복.”

미국 뉴저지주 퍼래머스에 위치한 SK바이오팜의 미국법인 SK라이프사이언스에서 만난 김홍욱 최고운영책임자(COO·상무)는 신약 개발의 목적을 이같이 강조했다. 이어 “이윤 창출이 목적이긴 하지만 생명을 다루는, 환자를 다루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약물로 환자의 질병을 개선하고 환자의 삶이 행복해지게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목표이고 가치”라고 덧붙였다. ‘뉴 SK’의 새로운 경영철학인 ‘딥체인지’와 ‘행복’이 해외 계열사까지 스며든 것이다.

미국 현지에서 만난 SK라이프라이언스 임원들은 뚜렷한 목적 의식과 변화에 대한 의지, 꾸준함이 신약 개발 성과의 배경이라고 입을 모았다. 지난해 미국 식품의약국(FDA)로부터 판매 승인을 받은 엑스코프리는 올해 2분기에 미국에서 본격 판매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 바이오 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신약 후보물질 발굴부터 FDA 허가까지 독자적으로 이뤄냈다.

김 상무는 “지난해 12월 미국 볼티모어에서 열린 미국뇌전증학회 연례회의(AES)에 참석했더니 FDA 승인 전후 SK에 대해 달라진 관심을 느낄 수 있었다”며 “그냥 한번 반짝이다 지는 별이 되지 않도록 그다음 FDA 허가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제약사인 존슨앤드존스를 거쳐 2016년 SK라이프사이언스의 최고상업화책임자(CCO)로 합류한 세비 보리엘로 CCO는 ‘약속에 대한 실천’을 SK만의 강점으로 꼽았다. 그는 “오랜 기간 포기하지 않고 자신감을 갖고 끝까지 임하는 집념이 SK의 강점”이라며 “우리 회사가 추구하는 가치 중 하나인 ‘개척자정신’에는 이러한 약속에 대한 실천에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세일즈·마케팅상무를 맡고 있는 제프 크라우더 씨도 “SK의 최대 강점은 여러 분야에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 있다는 점과 엑스코프리라는 차별화된 약품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중추신경계 분야는 연구 자체도, 신약 개발도 어려운 분야라 포기하는 회사들이 많았지만 SK라이프사이언스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도전해 이 분야 리더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덧붙였다.

퍼래머스=허동준 기자 hung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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