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째 반도체 산업 중심에 그가 있다…모리스 창 TSMC 창업자 스토리[딥다이브]

한애란 기자

입력 2024-11-02 10:00 수정 2024-11-0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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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산업의 태동기부터 지금까지, 무려 70년째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 거대 산업의 작동방식을 바꿔놓은 혁명가이기도 하죠. 바로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대만 TSMC 창업자 모리스 창입니다.

기계공학을 전공한 가난한 이민자였던 모리스 창이 어떻게 세계 기술산업 흐름을 재편한 선구자가 됐을까요. 그가 남과 다른 선택과 도전을 하게 만든 건 무엇일까요. TSMC를 이해할 열쇠가 될 모리스 창의 과거 스토리를 들여다보겠습니다.
모리스 창 TSMC 전 회장. 1931년생으로 현재 93세이다. AP 뉴시스
*이 기사는 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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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를 독학으로 익힌 엔지니어
1949년 중국 출신 18살 학생이 미국 하버드대 영문학과에 입학합니다. 이름은 장중머우(張忠謀), 훗날의 모리스 창입니다. 전쟁과 빈곤에 시달리던 조국을 떠나 발 디딘 미국은 “천국이었다”고 그는 회상하죠. 그때 그는 잘 몰랐겠지만, 유리 진공관을 대체할 트랜지스터가 미국 벨연구소에서 발명된 지 1년쯤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이듬해 그는 좋은 직장을 얻으려면 기술을 배워야 한단 생각에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로 편입합니다. 전공은 당시 인기 있던 기계공학. 1955년 석사를 마치자 4개 회사가 취업을 제안합니다. 가장 유명하고 끌린 곳은 포드 자동차. 하지만 덜 유명한 전자기업 실바니아가 포드보다 단 1달러 많은 월급 480달러를 제시합니다. 모리스 창은 호기롭게 포드에 전화해서 월급을 480달러로 맞춰줄 수 있느냐고 물었지만 단박에 거절당했죠. 그는 그렇게 운명처럼 실바니아에 입사해 이제 갓 태어난 반도체 산업을 만납니다. 
모리스 창은 하버드대에 입학했을 때 1000명 넘는 동급생 중 유일한 중국인이었다고 회상한다. 모리스 창 자서전 1권 수록 사진. 
그의 첫 임무는 트랜지스터 수율(정상 제품의 비율)을 끌어올리는 것. 그는 납땜의 열이 트랜지스터를 손상시키는 걸 알아내고, 간접 열로 와이어를 연결하는 방법을 찾아냅니다. 기계공학적으로 문제를 해결한 건데요.

그는 일을 위해 반도체 이론을 공부하기로 합니다.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노벨상 수상자 윌리엄 쇼클리 책을 교과서 삼았죠. 독학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장의 나이 많은 선임엔지니어가 매일 밤 호텔 바에서 몇시간씩 술을 마신다는 걸 알게 됐죠. 그래서 매일 퇴근 뒤 책으로 공부한 다음, 모르는 게 있을 때마다 호텔 바로 찾아가 엔지니어에게 술을 사주며 질문합니다. 모리스 창은 “그(선임엔지니어)는 전자공학에 대한 나의 스승이었다”고 회고하죠.

반도체 전문지식을 쌓은 모리스 창은 트랜지스터를 설계하는 업무로 옮깁니다. 기술 컨퍼런스에 참석하며 트렌드를 파악한 그는 깨닫게 되죠. 실바니아는 반도체에서 비전이 보이지 않는단 걸요. 그래서 1958년 TI(텍사스 인스트루먼츠)가 영입을 제안하자 주저 없이 떠납니다. 그는 첫 직장의 몰락에 대해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처음부터 반도체 산업은 빠르게 움직이고 용서 없는 산업이었습니다. 뒤처지면 따라잡기가 상당히 어려워집니다.”


공격적 가격 정책으로 시장을 뒤흔들다
당시 TI는 떠오르는 기술기업이었습니다. 1958년 TI 연구원 잭 킬비(2000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는 세상을 바꿀 신기술을 발명했죠. 바로 집적회로(IC)입니다.

모리스 창이 막 입사했을 때, TI는 IBM이 주문한 트랜지스터 생산라인 수율 때문에 골치였습니다. 당시 수율은 거의 0. 가끔 높아 봤자 2~3%였죠. 한마디로 죄다 불량품만 생산 중이었었습니다. 이 재앙적인 트랜지스터 생산 라인을 그가 맡았습니다.

그리고 석 달 뒤, 수율이 25~30%로 뛰어오릅니다. 그는 그 비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레시피를 여러 번 합리적으로 바꾸며 시도했습니다. 적절한 온도·압력·도펀트(불순물)를 추측하기 위해선 장치 물리학에 대한 기초 지식이 필요했습니다. 그게 바로 제가 실바니아에서 독학과 경험으로 능숙해진 거였죠. 오늘날 기준으론 ‘고대의 것’이지만, 그 당시엔 트랜지스터에서 좋은 수율 달성하는 기술은 매우 귀중했습니다.”

이 트랜지스터는 TI에 대박을 안겨줬고, TI 사장까지 그의 이름을 알 정도가 됩니다. 회사는 그에게 박사학위 후원을 제안했죠. 그는 급여와 학비를 지원받고 스탠퍼드대에서 전자공학 박사학위를 2년 반 만에 마칩니다. 이후 그는 TI에서 가장 빠르게 승진을 거듭해 1967년 집적회로 총괄 관리자가 됐죠.
미국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모리스 창. 그는 1962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지난해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도 자신이 미국인임을 분명히 했다. 모리스 창 자서전 1권 속 사진.
이 시절 그는 반도체의 가격 책정 방식을 완전히 바꿔버립니다. 그가 일으킨 반도체 업계의 혁명적 변화 중 하나인데요.

당시 반도체 판매 가격은 어떻게 정했을까요. 반도체 제조는 자본집약적 사업이죠. 워낙 초기 자본이 많이 들기 때문에 제조사는 가급적 비싼 가격을 매겨서 비용을 빨리 회수하려고만 했습니다.

하지만 생산라인 경험이 많은 모리스 창은 그게 틀렸다고 봤죠. 왜냐하면 새로운 생산라인은 아주 형편없는 수율로 시작하니까요. 수율을 끌어올리는 방법은 많이 생산해 보면서 계속 수정하고 훈련해 보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제품 가격이 너무 비싸다면? 찾는 고객이 없으니→생산량을 늘리지 못하고→수율은 제자리일 수밖에요.

그는 당시만 해도 작은 회사였던 보스턴컨설팅과 함께 ‘학습곡선 가격 책정’ 모델을 만듭니다. 칩 가격을 초기비용이나 시장가격보다 훨씬 낮게 책정해서 생산라인을 최대용량으로 가동하게 만드는 전략입니다. 초기 수익성은 희생하지만 대신 수율을 끌어올리는 시간을 크게 단축하고, 경쟁사를 압박할 수 있죠.

처음엔 어리석다고 손가락질받았던 이 전략은 적중합니다. TI의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높아졌고, 세계에서 가장 큰 집적회로 기업으로 부상하죠. 이제 학습곡선 가격 책정 모델은 반도체 업계의 표준입니다.


실패와 좌절…25년 직장을 떠나다
그는 언젠가 TI CEO가 되길 열망하는 잘나가는 임원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사는 1978년 그에게 새로운 중요한 일을 맡깁니다. 소비자 제품 총괄 부사장으로 임명했죠. 반도체 사업부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으니, 실적이 내리막인 계산기·손목시계 사업도 부활시킬 수 있을 거라 기대한 건데요. 그래서 어땠을까요.

네, 틀렸습니다. B2B와 B2C는 완전히 다른 분야였습니다. 저렴한 일본 제품에 밀리면서 창고엔 재고만 쌓여만 갔고, 시계 사업부는 1981년 폐쇄됐죠. 처절한 실패였습니다. 모리스 창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객 집단과 시장, 앞서가는 데 필요한 게 완전히 달랐습니다. 반도체 사업은 기술과 비용만 있으면 됩니다. 소비자 사업에선 기술이 도움은 되지만 소비자에게 어필하는 게 중요하죠.
1970년대 텍사스 인스트루먼츠가 판매했던 LED 전자 손목시계. 당시로선 첨단 기술을 접목한 신제품으로 주목받았지만, LED 전력소모가 커서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버튼을 누를 때만 시간이 짧게 표시됐다. 결국 항상 시간이 표시되는 LCD 전자 시계의 편리함에 밀려나게 된다.
1981년, 모리스 창은 ‘품질 및 인력 효율성 책임자’라는 직책으로 사실상 강등됩니다. 그는 “여전히 수석 부사장이었지만 사실상 방목지로 내쫓긴 것 같았다”고 회고하죠. 게다가 1980년 IBM이 신제품인 개인용 컴퓨터(PC)에 TI가 아닌 인텔의 프로세서를 채택합니다. TI 반도체 사업의 내리막이 시작된 거죠. ‘여기선 더 이상 흥미로운 일을 할 수 없다. CEO도 될 수 없겠다’고 생각한 그는 1983년 TI를 떠납니다.

그의 사임은 신문 기사로 알려졌고 그를 영입하겠다는 전화가 쇄도합니다. 그는 그중 규모가 제법 큰 제너럴 인스트루먼트의 사장 겸 COO(최고운영책임자) 자리를 맡는데요. 1년여 만에 이곳도 떠납니다. 제너럴 인스트루먼트는 반도체 사업을 이것저것 인수한 뒤 몸값을 높여 팔아치우는, 일종의 사모펀드 방식의 기업이었는데요. 기업의 유기적 성장을 추구하는 자신의 방향과는 맞지 않다고 본 겁니다.


나흘 만에 탄생한 사업 계획
1985년, 부유한 54세 실업자 모리스 창에게 대만 정부가 비영리 연구기관인 산업기술연구소(ITRI) 회장 자리를 제안합니다. 사실 그는 중국 본토 출신이라 대만과는 별 관련이 없었죠. 이미 1962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해 정체성은 미국인이었고요. 그에게 대만은 낯설고 가진 게 없는 나라였습니다. 그의 동료와 당시 부인(첫번째 부인)은 대만에 왜 가냐고 펄쩍 뛰었죠.

하지만 그는 이 제안을 덥석 받아들입니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저에겐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직업이었고 환경도 완전히 달랐습니다. 모든 것이 저에겐 너무나 다르게 보였죠. 그때쯤 저는 재정적으로 꽤 안정적이었습니다. 급여를 받지 않고도 평생 살 수 있었죠. 그래서 보상은 훨씬 낮았지만 대만이 너무나 새롭고 도전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왔습니다. 저는 큰돈이 있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관심사를 따라야 한다고 봅니다.”

대만에 온 지 몇 주 뒤, 지금은 ‘대만 경제 기적의 아버지’로 불리는 리궈딩 경제부 장관이 그를 불러 말합니다. “당신은 대형 반도체 기업을 경영한 경험이 많으니, 대만에서 새로운 반도체 기업을 시작하기에 적합할 거 같습니다. 일주일 정도 안에 총리에게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한지 알려주세요.”

다음날, 리궈딩 장관은 일주일이 아니라 3일 뒤 총리에게 프리젠테이션을 해달라고 다시 요청합니다. 사실 모리스 창은 일주일이나 기다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아이디어가 금세 떠올랐기 때문이죠. 그렇게 나흘 만에 세계 최초의 순수 파운드리 기업이란 구상이 탄생합니다.
TSMC 공장의 모습. TSMC는 ‘고객과 결코 경쟁하지 않는다’, ‘파운드리라는 본업에 집중한다’는 경영철학을 내세운다. TSMC 제공


반도체 산업을 바꾸고 세상을 바꿨다
당시 세상의 모든 선도적인 반도체 기업은 자체적으로 제품을 생산했습니다. IDM이라 부르는 종합반도체 회사가 거의 전부였죠. 설계만 하고 생산은 다른 기업에 맡기는 팹리스 기업? 사실상 1980년대 중반엔 없다시피 했고요. 1990년대 초까지도 그 수가 100개가 채 되지 않을 정도로 미미했습니다. AMD 공동창업자였던 제리 샌더스는 1992년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죠. “진짜 남자는 팹을 갖고 있다”(자체 공장이 없는 가난한 팹리스 경쟁사를 비하한 말인데 정작 AMD도 2008년 공장을 매각하고 팹리스가 됨).

그런데 1985년에 모리스 창은 고객사 주문을 받아 칩을 생산하기만 하는 순수 파운드리 사업을 기획합니다. 주문할 고객(팹리스 기업)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즉, 아예 없는 시장을 새로 만들겠다고 한 겁니다.

도대체 뭘 믿고 그는 이런 무모한 도전을 벌였을까요. 그의 통찰력은 두가지였습니다.
대만에서 만난 모리스 창 TSMC 창업자와 젠슨 황 엔비디아 CEO의 모습. 뉴시스
1. 대만이 잘할 만한 게 제조뿐이었습니다.
모리스 창은 아주 냉정하게 말합니다. “우리(대만)는 어떤 강점을 갖고 있을까요? 결론은 매우 적다는 겁니다. 우리는 연구개발, 회로설계, IC 제품 설계, 영업과 마케팅, 지식재산권에 강점이 거의 없습니다. 대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잠재적 강점은 제조였습니다. 그 강점에 맞고, 다른 약점을 피하기 위한 답은 순수 파운드리였습니다.”

2. 새로운 시장이 열릴 가능성을 봤습니다.
그는 TI와 제너럴 인스트루먼트에서의 경험을 회고합니다. “많은 통합 회로 설계자들이 회사를 떠나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고 싶어 하는 걸 봤습니다. 그들이 떠나지 못한 건 회사를 설립할 만큼 충분한 자금을 조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웨이퍼 팹을 건설할 자금이 부족했습니다.” 만약 자체 생산라인을 구축하지 않고, 제조를 남에게 맡길 수 있다면? 창업자금은 100분의 1로 줄어들 겁니다. 순수 파운드리 기업이 필요한 이유였습니다.

그렇게 모리스 창은 프리젠테이션을 했습니다. 세계 최초 파운드리 기업을 대만에 세우기 위해 필요한 자본은 2억2000만 달러. 대만 정부가 절반을 대지만, 상당한 외부 투자가 필요했습니다. 모리스 창은 미국으로 건너가 인텔, TI를 만났죠. 돌아온 대답은 모두 ‘노’. 다행히 마지막으로 접촉한 네덜란드 기업 필립스에서 5800만 달러(28% 지분율) 투자를 얻어냅니다. 이는 필립스에서 분사한 또 다른 네덜란드 기업, ASML과의 관계의 시작이기도 했죠. 나머지 지분은 대만 정부가 기업들을 찔러서 채웁니다.

1987년 여름, 직원 수 50명의 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TSMC)가 설립됐습니다. TSMC 회장을 맡은 모리스 창이 당시 받은 지분은? 0이었습니다. 설립 대가로 받는 주식이 한 주도 없었죠. 몇 년 뒤 그는 자신이 저축한 돈을 털어 TSMC 지분 0.5%를 사들였고, 현재 그 가치는 50억 달러로 불어났습니다.

모리스 창의 선견지명은 들어맞았습니다. 1987년 당시 전 세계에 20개 남짓이던 팹리스 기업은 이제 수천 개로 늘어났죠. 엔비디아, 퀄컴, 브로드컴은 초기부터 TSMC와 손잡은 고객사입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모리스와 TSMC에 대해 알게 됐을 때 설렜다”면서 “TSMC 없이는 엔비디아가 불가능했다”고 여러 차례 밝혔을 정도이죠.

TSMC는 다른 어떤 기업도 해본 적 없는 방식으로 반도체 사업을 지배 중입니다. 올해 2분기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 점유율은 62%. 갈수록 지배력이 커지는데요.
이 독주 체제가 얼마나 이어질지와 별개로, 순수 파운드리 TSMC의 등장은 반도체 산업의 혁명이었습니다. 이 산업의 풍경을 완전히 바꿔놨죠. 2018년 은퇴했지만, 며칠 전에도 93세 나이로 TSMC 연례 체육대회에 참석해 “반도체 자유무역은 죽었다”며 경고를 날린 모리스 창 전 회장. ‘칩 워(Chip War)’의 저자 크리스 밀러 말대로 그는 “지난 100년 동안 가장 과소평가된 기업인”일지 모릅니다. By.딥다이브

흔히 모리스 창을 두고 한국 언론에선 ‘조국을 위해 반도체 산업을 육성한’ 애국적 인물처럼 묘사하곤 하는데요. 정작 본인은 지난해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미국인임을 분명히 했죠. 그의 과거 인터뷰 기록을 다시 살펴보면서, 어쩌면 미국 대기업에서 유리천장에 부딪혔던 좌절이 그를 다시 불타오르게 만들었던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애국심 같은 게 아니라 자존심이 진짜 원동력이랄까요. 참고로 이달 말 대만에서 그의 자서전 2탄(TSMC 설립 이후 스토리를 담은)이 출간될 거라고 하죠. 번역되면 읽어 보고, 재미있는 내용은 또 레터로 전하겠습니다.

*이 기사는 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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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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