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 메우려면 증세 불가피”… “지금은 경제 살리기에 집중할 때”[인사이드&인사이트]

남건우 경제부 기자

입력 2020-06-05 03:00:00 수정 2020-06-05 10:04:46

|
폰트
|
뉴스듣기
|
기사공유 | 
  • 페이스북
  • 트위터
재정지출 확대 속 고개드는 증세론
올해 국가채무비율 43.5%로 껑충… 저출산 고령화로 복지지출 눈덩이
국책연구기관 “논의 시작해야” 일각선 “부가세 인상해 보편증세”
“소비-투자 위축 초래할 것” 반론… 정부도 “고려할 타이밍 아니다”
과거 세금인상, 여론 악화 불러… 전문가들 “국민공감부터 끌어내야”


남건우 경제부 기자
정부가 코로나19에 대응해 재정 투입규모를 늘리면서 중장기적으로 증세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나랏돈의 지출이 급증하는 만큼 곳간을 어떻게 채워 넣을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부는 일단 “증세를 고려할 타이밍은 아니다”며 선을 긋고 있다. 그보다는 우선 불필요한 지출의 구조조정 등으로 필요한 돈을 마련해보겠다고 말한다. 또 재정 지출을 늘리면 경기가 살아나 자연스럽게 세수가 늘어날 수 있다는 재정 선순환론도 펴고 있다.

역대 정부의 사례를 보면 세금을 올린 뒤에는 여론 악화와 지지율 하락이 거의 매번 동반됐다. 그만큼 증세는 아무리 명분이 확실하더라도 정권 차원에서 함부로 추진할 수 없는 과제다.


하지만 저출산·고령화로 복지 지출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우리나라의 재정 상황을 보면 장기적으로 국민의 조세 부담을 늘리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코로나발 경제위기에 따른 재정 악화 논란은 단지 증세 논의의 ‘트리거’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 늘어나는 복지 지출, 피할 수 없는 증세 논의
최근 증세 논의의 신호탄은 국책연구기관에서 나왔다. 정규철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전망실장은 지난달 브리핑에서 “재정을 늘려서 썼으면 나중에 갚아야 하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라며 “당장은 증세가 어려워도, 지금부터 논의는 시작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유찬 조세재정연구원장도 “증세를 뒤로 미루지 말고 적절한 규모로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 같은 주장이 힘을 얻고 있는 것은 최근 재정 상황 때문이다. 정부가 3차 추가경정예산안을 역대 최대 규모인 35조3000억 원 규모로 편성함에 따라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지난해 37.1%에서 올해 43.5%로 껑충 뛰었다. 앞으로도 재정 지출은 고령화와 경기 침체 등으로 인해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이처럼 늘어나는 지출은 현재 세수 추이로는 감당하기 버겁다. 국세청은 지금 같은 추이라면 올해 세수가 정부 전망보다 18조 원 이상 부족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렇게 구멍 난 재정을 메우기 위해선 증세 등으로 세입 기반을 늘리는 노력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조세부담률이 주요 선진국에 비해 낮은 수준이라는 것도 증세 주장에 힘을 싣고 있다. 2018년 기준 한국의 조세부담률은 약 20% 수준으로 2017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보다 5%포인트가량 낮다. 이런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우리나라의 복지 제도가 ‘중부담 중복지’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세금 인상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일부 고소득 계층이나 대기업이 아닌 전 국민에 대해 세금을 올려야 한다는 주장도 꾸준히 나온다. 이른바 ‘보편적 증세’를 하지 않고서는 막대한 재정 소요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뜻에서다.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의 이태수 위원은 지난해 12월 열린 ‘혁신적 포용국가 미래비전 2045’ 발표회에서 고령화 등으로 인한 복지 재원 확보를 위해 누진적 보편 증세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고 밝혔다. 물론 이 같은 보편 증세 논의는 저소득층의 여론 악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학계를 중심으로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보편 증세를 주장하는 전문가들은 부가가치세 인상 카드를 주로 거론한다. 부가세가 도입된 지 40년이 넘었음에도 세율은 10%로 처음 그대로라는 것이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한국의 부가세율은 OECD 회원국 중 32위 수준이다. 랜들 존스 OECD 한국경제담당관은 2018년 ‘한국 경제보고서’에서 “한국의 부가세율은 10%인데 OECD 회원국 평균은 19%를 넘는다”며 공공지출 재원을 부가세 인상으로 마련하길 권했다.

비과세·감면 축소도 증세 방안으로 꼽힌다. 새로운 세목을 신설하거나 기존 세금의 세율을 올리지 않고 불필요한 감면제도를 정비해 세원을 넓힌다는 것이다. 세율을 직접 손대지 않아 조세저항이 덜하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부가세, 법인세와 더불어 3대 세목 중 하나인 소득세는 비과세·감면 축소만으로도 세원을 크게 늘릴 수 있다. 각종 소득공제 혜택으로 소득세를 내지 않는 근로자의 비중은 2018년 기준 38.9%에 달한다.

○ 세 부담 높이면 경제 활력 떨어져…여론 악화 우려도
증세가 필요한 근거는 차고 넘치지만 이를 쉽게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도 만만치 않다. 증세가 자칫 가뜩이나 어려운 경기를 더 어렵게 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가계와 기업의 세 부담 증가는 가처분소득 및 기업 이익 감소로 이어지기 때문에 소비와 투자 확대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이승석 한국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법인세율 인상은 기업의 순자산 축소를 유발해 투자를 감소시킨다”며 “소득세율 인상도 고소득 가계의 소비를 줄여 내수를 악화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요즘 세계 각국이 리쇼어링(기업 유턴) 정책을 펴면서 법인세율 인하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만의 법인세 인상은 자칫 대세를 거스르는 정책이 될 수 있다. 부가세 인상 역시 소비 부진을 더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선뜻 꺼내 들기 어려운 카드다.

정부 역시 이 같은 이유로 증세 가능성에 대해 선을 긋고 있다. 한 정부 관계자는 “3차 추경안과 같은 경기 부양책을 내놓은 마당에 증세를 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재정을 건실하게 하는 것보다는 급락하는 경기를 떠받치는 게 훨씬 급선무라는 것이다.

한국의 재정건전성이 그나마 아직은 비교적 양호하다는 점도 정부가 증세에 거리를 두는 이유 중 하나다. 한국의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올해 43.5%로 2018년 기준 OECD 회원국 평균인 109.2%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세금 인상이 역대 정권에서 항상 지지율 하락 등으로 이어졌다는 점도 정부에는 부담이다. 박정희 정부 때인 1977년의 부가가치세 도입은 1979년 부마항쟁을 촉발시킨 한 원인으로 지금도 꼽히고 있다. 일본에서도 소비세율 인상이 집권당의 선거 참패로 이어지는 사례가 잦았다. 최근에는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 기획재정부가 소득세 연말정산 공제 혜택을 줄이는 방식으로 증세를 시도했다가 국민 여론의 지탄을 받은 적이 있다.

아직 증세를 위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한 것도 증세를 어렵게 하는 이유 중 하나다. 한국사회복지정책학회가 지난해 발표한 보고서와 설문 결과에 따르면 ‘모두가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한다’는 방안에 대해 찬성(32.4%)한 응답자보다 반대(35%)한 사람이 더 많았다. 나머지는 중립이었다. 반면 ‘고소득층에서 더 많은 세금을 걷어야 한다’는 문항에서는 찬성(81.6%) 응답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보편적 증세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상당히 큰 것이다.

○ “증세 문제, 대국민 설득 거쳐 단계적으로 풀어가야”
전문가들은 중장기적으로 증세가 불가피하다면 대국민 설득을 통해 이 문제를 단계적으로 풀어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를 위해서는 복지 확대를 먼저 경험한 유럽의 사례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고부담-고복지 국가인 스웨덴은 충분한 실업수당과 무상 의료 등 높은 수준의 복지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국민들의 조세저항을 줄인 것으로 평가된다. 스웨덴의 조세부담률은 1930년까지는 8∼10% 수준으로 낮았지만, 사민당이 집권한 1932년부터 점진적으로 높아져 1960년에는 28.7%에 이르렀다. 복지제도를 확대하는 한편 재원 마련을 위한 세금 인상을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해온 셈이다.

한국보다 고령화를 먼저 겪은 일본은 과거에 재정건전성을 높이기 위해 부가세율을 단계적으로 인상했다. 그러면서 국민들의 부담을 줄이는 정책을 병행해 부작용을 최소화했다. 조승래 국회입법조사처 팀장은 “일본은 부가세 인상을 추진하는 동시에 저소득층에 대한 보육료와 교육비 지원을 늘렸다”고 설명했다.

반면 갑작스러운 증세는 돌이킬 수 없는 부작용을 키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프랑스가 2013년 최고 세율이 75%에 이르는 부유세를 도입했을 때 고소득자들은 세금 폭탄을 피하기 위해 대거 망명을 떠났다. 프랑스 언론은 급격한 부유세 도입이 프랑스 기업의 해외도피 현상을 유발해 경제성장률에 손실을 입혔다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정책 신뢰도를 높이면 국민들의 증세에 대한 거부감도 함께 줄어들 수 있다고 말한다. 박경돈 한국교통대 행정학부 교수는 ‘복지증세에 대한 인식과 영향요인’ 논문에서 “정부가 복지 누수, 횡령, 불법 수급 등을 줄이면 국민들은 정책 집행이 우수하다고 느껴 증세에 호의적이 된다”고 분석했다. 얼마 전 복지정책학회 설문조사에서도 ‘정부가 효율적으로 운영된다면 세금을 더 많이 낼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48%가 “그렇다”고 답했다.

남건우 경제부 기자 woo@donga.com


라이프



모바일 버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