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반도체장비 글로벌 빅4, 한국기업에 ‘특허 공습’

박현익 기자

입력 2024-05-28 03:00 수정 2024-05-28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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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건수 4년새 2배… 잇단 소송




글로벌 반도체 장비업계 ‘빅4’의 국내 특허 등록 건수가 최근 4년 사이 2배 이상 뛴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등록한 특허를 무기 삼아 국내 기업들을 상대로 특허 분쟁을 동시다발적으로 벌이고 있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한국은 반도체 제조 강국이지만 장비 분야는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견·중소기업이 대부분인 국내 장비업계는 글로벌 선두업체들의 특허 공습에 성장의 싹이 꺾이고 있는 상황이다.

27일 동아일보가 특허청으로부터 받은 최근 5년간 해외 반도체 기업의 국내 특허 등록 현황에 따르면 미국 어플라이드머티리얼스(AMAT), 네덜란드 ASML, 미국 램리서치, 일본 도쿄일렉트론 등 글로벌 장비 1∼4위 업체의 특허 등록 건수는 2019년 585건에서 지난해 1266건으로 116.4% 급증했다. 이들 기업은 최근 3년간 매년 총 1000건 넘게 국내에 특허를 등록하고 있다. 한 특허 전문 변호사는 “국내 중견·중소기업들이 글로벌 기업의 특허를 피해 제품을 개발하기 쉽지 않다”며 “글로벌 기업들의 특허 등록이 많아질수록 국내 경쟁사들과의 특허 분쟁 소지도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반도체 식각 분야 세계 1위 램리서치는 현재 최소 2건의 특허 소송을 국내 기업과 진행 중이다. 증착 분야 10대 기업 중 하나인 일본 고쿠사이일렉트릭도 2월 총 4건의 소송을 제기했다. 해외 거대 장비사는 매출이 한국 업체보다 많게는 수천 배 커 ‘글로벌 골리앗과 국내 다윗의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손승우 한국지식재산연구원장은 “기업들이 사업 수립 단계부터 특허 리스크를 관리하고 소송에 대응할 준비를 해야 한다”며 “정부도 장기적으로 한국 기업들이 독자 기술력을 갖추도록 육성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美 ‘반도체 장비 골리앗’, 韓 중기에 ‘특허 소송-내용증명’ 공세


[반도체 장비 특허 공습]
반도체장비 빅4 특허 소송 압박
연매출 23조원 美기업 램리서치… 100억 미만 中企에 생산중단 압박
中企들 소송시간-비용 감당 힘들어… “특허리스크 관리-독자 R&D 필요”
연매출 50억 원(2022년 기준) 규모의 국내 반도체 장비기업 A사는 매출 23조7000억 원인 미국 램리서치에 1년 매출에 버금가는 금액을 배상해야 할 처지다. 램리서치가 제기한 특허소송 2심에서 최근 한국 법원이 1심 판결과 반대로 램리서치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A사의 제품은 반도체 웨이퍼를 깎는 식각 장비의 핵심 장치를 고정하는 부품이다. 유지·보수 과정에서 흔히 교체하는 소모성 부품이지만 램리서치는 생산, 판매 권한이 자사에만 있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A사에 34억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지연이자까지 더해 37억 원으로 불어났다.

글로벌 장비업체들의 ‘특허 공습’에 국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글로벌 업체들이 국내에 광범위하게 특허를 등록한 뒤 국내 업체들에 특허를 침해했다며 소송을 거는 방식이다. 많게는 체급이 수천 배 차이 나는 ‘골리앗’과의 소송전에 한국 중소기업이 대응하다 보면 시간과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다. 전문가들은 국내 소부장 기업들도 특허 리스크 관리와 독자적인 연구개발(R&D) 역량 강화에 나서야 한다고 조언한다.


● 램리서치, 韓 중소기업에 소송·내용증명



27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램리서치는 최근 A사와의 2심 판결을 토대로 복수의 국내 기업들에 “현재 생산하는 장비 부품에 특허 침해 소지가 있으니 즉각 생산 및 판매를 중단하라”는 내용증명을 보냈다. 램리서치는 반도체 식각 공정 분야 글로벌 1위다. 반면 내용증명을 받은 업체들 중 일부는 연매출이 100억 원도 넘지 못한다. 국내 장비업계 관계자는 “램리서치에는 아주 작은 소모성 부품이겠지만 국내 기업 입장에서는 멈추면 먹거리가 끊기는 핵심 사업”이라고 말했다.

램리서치는 국내 장비회사 피에스케이(PSK)와도 특허 소송을 벌이고 있다. ‘베벨 에처’라는 PSK의 식각 장비가 램리서치의 특허를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26일 첫 변론기일을 진행했다.

일본 장비회사 고쿠사이일렉트릭도 2월 국내 유진테크를 상대로 총 4건의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증착은 반도체 실리콘 기판 위에 얇은 막을 쌓는 과정으로, 고쿠사이는 연매출 2조2000억 원의 증착 분야 글로벌 10대 기업이다.

특허청에 따르면 빅4 장비업체들은 지난해 국내에서 총 1266건의 특허를 등록했다. 도쿄일렉트론 494건, AMAT 409건, 램리서치 238건, ASML 125건 순이었다. 2019년 585건의 2.2배다.

국내 장비업계는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분쟁이 훨씬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협력업체 입장에서 법적 분쟁 사실이 드러나면 주문이 끊길 위험도 있다 보니 대외적으로 쉬쉬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 “삼성, SK도 방패막이 힘들어”



글로벌 반도체 장비기업들의 특허 등록이 급증하는 것은 미중 기술 패권 다툼이 격화하며 국가 간, 기업 간 기술 독점력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경기 용인시에 조성 중인 초거대 반도체 클러스터를 노리고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찾으려는 목적도 깔렸다는 게 반도체 업계 시각이다.

한 특허 전문 변호사는 “해외 장비기업들은 ‘에버그린 전략’으로 핵심 기술뿐만 아니라 밑바닥 소모품까지 모든 밸류체인(가치사슬)을 독점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약·바이오 업계에서 유래한 에버그린 전략은 오리지널 제약사가 기존 특허를 업그레이드한 ‘개량 특허’를 지속적으로 출원, 등록해 경쟁사 진입을 차단하고 독점 기간을 연장하는 수법을 말한다.

국내 한 장비업체 사장은 “과거에는 글로벌 업체로부터 장비를 구매하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형님처럼 나서 ‘싸우지 말고 잘 화해하라’며 우산 역할을 해주기도 했다”며 “하지만 최근 반도체가 외교 문제로 부각되고 글로벌 장비사들의 위상도 ‘슈퍼 을’로 불리며 크게 올라 선뜻 나서기를 꺼리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소부장 업계는 글로벌 업체들의 특허 남발을 막기 위해 특허 심사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국내 업체들도 대응 역량을 키우기 위해 교육이나 컨설팅 등을 적극적으로 받을 것을 조언했다. 국내 기업끼리 협력하자는 목소리도 있다. 글로벌 대기업과의 분쟁에 공동 대응하는 단체를 만들거나 인수합병(M&A)을 통해 몸집을 키우자는 것이다.

또 다른 특허 전문 변호사는 “이럴 때일수록 해외 경쟁사들이 넘보지 못하는 독자 기술력 강화에 힘써야 할 때”라며 “정부가 장벽을 쌓길 기다리기만 하면 국내 기업들은 내수 시장에서조차 밀려날 것”이라고 말했다.



박현익 기자 bee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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