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소송 없이도… 갑질피해 中企 신속한 구제 쉬워졌다

김호경 기자

입력 2020-09-24 03:00 수정 2020-09-2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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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품단가 후려치기-기술탈취 등 상생조정위 1년간 11건 해결
새 규정에 따라 상설기구로 설치
합의 못하면 행정처분, 수사의뢰


국내 한 중견기업으로부터 전자부품 제조를 위탁받아 생산하고 있는 중소기업 A사는 올해 6월 중소벤처기업부에 분쟁 조정을 신청했다. 2011년 이후 인건비와 원부자재 등 각종 비용이 올랐지만 위탁 기업이 납품단가를 인상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기부가 중재에 나선 지 한 달여 만에 위탁 기업은 납품단가를 올려주는 데 합의했다. A사 대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사정이 어려웠는데 이번 조정으로 영업이익이 크게 늘게 됐다”고 말했다.

납품단가 후려치기나 미지급, 기술 탈취 등 ‘갑(甲)질’ 피해를 입은 중소기업들이 상생조정위원회 조정을 통해 법정 소송까지 가지 않고도 신속하게 구제받고 있다.

23일 중기부에 따르면 지난해 6월 상생조정위원회가 출범한 이후 지금까지 11건의 분쟁 조정이 완료됐다. 상생조정위원회는 불공정 행위 관련 분쟁을 신속하게 해결하기 위한 민관 공동 위원회다. 지난해 6월 활동을 시작했지만 올해 6월 설립 근거를 담은 ‘상생조정위원회 설치 및 운영에 관한 규정’이 생기며 상설 기구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이전에도 불공정 행위에 대한 조정 자체는 가능했다. 하지만 수·위탁 거래와 기술 탈취 분쟁 조정은 중기부, 하도급 거래는 공정거래위원회, 특허나 상표권 침해는 특허청 등으로 업무가 쪼개져 있었다. 이렇다 보니 여러 불공정 행위가 얽혀 있는 사건을 처리할 때 협업이 원활하지 않았다. 부처별로 판단이 엇갈리기도 했다.

중기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상생조정위원회는 중기부 차관, 공정위 부위원장, 대검찰청 차장검사, 경찰청 차장, 특허청 차장, 대·중소기업·농어업협력재단 사무총장, 중소기업중앙회 상근부회장,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민간 전문가 등으로 구성됐다. 중기부 측은 “상생조정위원회는 분쟁과 관련된 부처와 민간이 체계적으로 갈등을 조정하는 플랫폼”이라고 설명했다.

상생조정위원회는 처벌과 규제보다는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게 목표다. 그래야 피해 기업을 신속하게 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정부는 관련 법령에 따라 행정처분을 내리거나 검찰에 수사를 의뢰한다. 문제는 기업이 이에 불복해 소송을 제기하면 법원의 판단이 나올 때까지 피해 구제가 늦어지는 점이다. 피해 기업이 직접 고소하더라도 막대한 소송비와 시간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실제 조정이 성립된 11건 중 2건은 검찰이 수사 과정에서 처벌보다는 조정을 통한 해결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해 상생조정위원회에 상정한 사건들이다. 중기부 관계자는 “조정이 이뤄지면 분쟁 당사자 기업에는 행정처분을 하지 않고, 관련 수사도 중단된다”고 설명했다.

상생조정위원회는 중기중앙회가 개발한 ‘표준 공동기술 개발 계약서’를 이달 28일부터 중기부, 공정위, 특허청 홈페이지에서 무료 배포하기로 했다. 서승원 중기중앙회 상근부회장은 “그간 영세 기업이 대기업이 작성한 내용대로 계약했다가 나중에 피해를 보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며 “표준 계약서는 이런 피해를 예방하고 분쟁 시 대항력을 높이기 위한 보호 장치”라고 설명했다. 박영선 중기부 장관은 “큰 기업들의 갑질로 을(乙)들이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상생조정위원회가 더욱 힘쓰겠다”고 말했다.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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