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조 반도체단지, 모호한 법령에 발목… 3년째 첫 삽도 못떴다

송충현 기자 , 홍석호 기자

입력 2022-03-30 03:00 수정 2022-03-30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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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현장 ‘신발 속 돌멩이’ 규제〈하〉풀리지 않는 규제의 고리
용인 원삼면 SK하이닉스 공장
‘환경영향평가’ 애매한 규정에 주민 의견수렴에만 2년 넘게 걸려
원격진료법, 국회서 번번이 폐기… 서비스산업발전법은 10년째 표류
“정치권, 이익단체 눈치 보느라 포기… 정책 수립부터 민관이 동반자 돼야”


SK하이닉스가 120조 원을 투자해 반도체 공장 4개를 지을 예정인 경기 용인시 원삼면 일대. 환경 규제 처리 일정이 길어지며 2019년 첫 계획 발표 뒤 현재까지 부지 공사는 첫 삽조차 뜨지 못했다. 뉴스1

SK하이닉스는 120조 원을 투자해 경기 용인시 원삼면 일대에 반도체 공장 4개를 지을 계획이었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투자 경쟁에서 앞서 나가기 위한 결정이었다. 정부도 2019년 2월 반도체 특화 클러스터 조성 계획을 밝히며 이를 지원하는 듯했다.

그러나 3년여가 지난 지금 반도체공장은커녕 산업단지 조성 공사조차 첫 삽을 뜨지 못했다. 모호한 법 규정과 공무원들의 규제범위 확대 적용 때문이다.

환경영향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 대상이 ‘사업 시행으로 영향을 받는 지역’으로 모호하게 설정돼 있었다. SK하이닉스는 공장 부지는 물론이고 인접한 안성시 주민 의견까지 수렴해야 했다. 법령을 광범위하게 해석하면서 의견 수렴 대상이 넓어졌고 결국 산업단지계획 승인까지만 2년이 넘게 걸렸다. 안기현 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민원이 나오는 것을 꺼리는 공무원들은 법령이 명확하지 않으면 규제를 광범위하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29일 본보가 대한상공회의소,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경제단체와 주요 기업들로부터 산업 현장에서 개선되지 않는 규제의 문제점을 취합한 결과 국가 전략산업에 영향을 주는 사례들이 다수 발견됐다.

1월에 통과된 ‘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보호에 관한 특별조치법’(반도체특별법)에 대한 기대감도 낮아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그동안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등을 포함해 적기 투자에 필요한 인허가 지원 특례를 요구해 왔다. 그러나 대기업 특혜 논란 등으로 번지며 5월까지 입법예고할 하위법령들은 업계 요구 수준을 한참 밑돌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헬스케어 등 차세대 산업의 발목을 잡는 규제 개선은 국회 문턱을 번번이 넘지 못했다. 의사와 환자 간 원격 모니터링 및 진료를 도입하는 의료법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2010, 2014, 2016년 세 차례나 정부안이 제출됐으나 18∼20대 국회에서 제대로 된 논의조차 없이 결국 폐기됐다.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10년째 표류 중이다. 서비스산업 전체 발전을 위해 과감하게 규제를 완화하자는 법인데 ‘보건 및 의료 분야’의 포함 여부를 놓고 정치권이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경제단체 한 관계자는 “정치권이나 정부가 새로운 산업을 가로막는 규제를 손보겠다고 공언한 뒤에도 막상 시민단체나 이익집단의 눈치를 보느라 스스로 포기하는 경우가 반복돼 왔다”며 “과거 환경을 반영한 낡은 규제들이 아직도 개선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기업으로선 각종 규제로 사업이 지장을 받아도 어디에 하소연할 수도 없는 게 현실”이라며 “기업의 이런 현실을 알기 때문에 시민단체 등의 민원이 더 심해지는 측면도 있다”고 했다.

경제단체들은 규제 개혁에 민간의 목소리를 합리적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이날 ‘제49회 상공의날’ 기념식에서 “민간이 정부 정책의 조언자가 아닌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며 “정책 수립 초기부터 민과 관이 원팀이 돼 당면 문제를 하나씩 풀어간다면 사회에도 긍정적 변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장도 21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의 경제6단체장 오찬에서 “세계적 기준에 맞지 않는 규제를 개선해 경쟁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전문가들도 민간으로의 ‘무게중심’ 이동이 필수적이라고 조언한다. 지금처럼 정부 중심이 아니라 민간이 주축이 된 규제개혁위원회를 구축해 과제 선정부터 심사와 시행까지 산업 현장의 의견이 반영돼야 한다는 것이다.

민간 기업 최고경영자(CEO)가 직접 규제개혁조직의 수장을 맡는 방식 등이 도입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강명헌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지금까지 위원회는 정부가 책임을 넘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정부가 민간 의견을 수렴하는 수준을 벗어나 기업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정책에 반영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규제 법령을 해소하거나 완화하는 ‘키’는 국회가 쥐고 있는 만큼 정부뿐 아니라 정치권에서 대승적 차원의 규제 완화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국회는 규제 법안의 타당성을 합리적으로 검토하고 정부는 새로운 규제를 검토할 때 업계에 미칠 영향을 충분히 살펴야 한다”고 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홍석호 기자 wil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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