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가 필요한 당신에게 권하는 그림 [영감 한 스푼]

김민 기자

입력 2022-03-19 11:00 수정 2022-03-1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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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직한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서용선 작품 ‘콘크리트 골조공사’의 일부

여러분 안녕하세요.

지난주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예술 세계를 소개하고 여러 독자분들이 흥미로운 의견을 보내주셨답니다. 아래 ‘구독자 의견’ 코너에서 자세히 소개하겠지만, 그림이 단순히 대상의 묘사를 넘어 작가의 철학과 생각을 표현하는 장이 되었다는 이야기에 공감해준 분들이 계셔서 기뻤습니다.

오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지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한국 작가의 작품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예술이 등장하고 벌써 100년이 지났지요. (검은 사각형이 1914년 작품입니다.) 그 후 미술은 또 다시 엄청나게 다양한 갈래로 전개되어왔습니다. 그런 경향 중 하나로 한국의 현대 미술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말레비치의 절대주의가 단순히 작가의 행위 그 자체를 강조하는 것을 통해 문을 열었다면, 그 장 위에서 현대미술 작가들이 어떻게 자신만의 예술을 펼쳐 보였는지를 살펴보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그림을 보면서 시작하겠습니다.

영감 한 스푼 미리 보기: 나의 눈으로 본 세상을 나만의 시각언어로 표현하다


서용선

1. 작업 활동 초기에 소나무를 그렸던 서용선 작가는 누가 봐도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부었다.

2. 그러나 절대적인 객관성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이런 생각을 과감하게 밀고 나가 역사의 이면(단종 역사화)과 도시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3. 사회가 정한 이데올로기(조선왕조실록)나 고정된 편견(도시의 겉모습)을 벗겨내고 나의 눈으로 본 대상의 속살을 그림으로써 작가는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나가고 있다.

○ 보도블럭 격자와 건물 틈에 갇힌 뉴요커
서용선, 생명의 도시, 56St.+6 Ave. 2019~2022년, 캔버스에 아크릴, 302 x 687 cm


위 그림은 서용선 작가가 2019년 10월 미국 뉴욕 미드타운에 머물렀을 때 보고 느낀 바를 담고 있습니다. 제목에도 적혀 있듯이 56번가, 고층 빌딩이 화려하게 들어서 있는 맨하탄의 상업 지구를 표현한 그림입니다.

보통 맨하탄이라고 할 때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요? 정장을 갖춰 입고 바쁘게 걸어 가는 사람들, 반짝이는 태양빛이 반사되는 거대한 유리 빌딩들, 세계를 이끄는 도시의 돈 냄새… 이런 것들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그런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엉뚱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지요.

저는 이 그림을 처음 마주했을 때,

“그림 속 사람들이 참 불편해 보인다”

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뉴욕이 주는 클리셰적인 이미지를 벗겨내고 한 번 그림을 같이 보겠습니다.

서용선, 생명의 도시(일부)


이번 전시에 공개된 ‘생명의 도시’는 가로 6m가 넘는 대작이라,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도록 나누어 보았습니다. 그림 왼쪽에 있던 인물의 모습인데요. 이 인물은 아래쪽 보도 블럭이 만들어낸 격자 위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얹고 있습니다.

또 오피스빌딩 내부로 빽빽이 들어선 은행 ATM기가 보이시나요? 그 가운데 간신히 생겨난 틈에 인물이 배치되어 있어서, 왼쪽에 놓인 검은 공간으로만 겨우 움직일 것처럼 꽉 짜여진 틀에 놓여 있는 모습입니다.

서용선, 생명의 도시(일부)



오른쪽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도블럭 격자를 마치 줄타기 하듯 올라서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금방이라도 밖으로 밀어낼 듯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는 체이스 은행의 로고.

또 지하철 역 옆으로 간신히 열린 공간에도 빌딩숲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죠. 화려하고 정돈된 것처럼 보이지만, 저에게는 이런 도시가 만들어낸 격자무늬가 감옥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서용선 작가는 이 풍경에 대해 뭐라고 말했을까요?

“이 공간은 제가 여러 차례 뉴욕을 드나들며 잠깐씩 방문을 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그 거리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노동하다 퇴역한 사람,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배달해주는 사람, 약속 시간이 비어서 건물에 기대어 약간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전해졌고, 그것이 56번가 거리의 성격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느낀 거리의 성격을 명확하게 언어로 제시하진 않았지만, ‘노동하다 퇴역’, ‘배달’, ‘빈 시간을 보낸다’라는 말에서 저는 ‘어중간함’이라는 키워드가 느껴졌습니다. 이 거리에 속한 사람 대부분은 사실 차를 타고 다닐 것입니다. 빽빽한 오피스빌딩을 거니는 사람들은 즉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틈바구니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저는 이해가 되더군요.

제가 이 부분을 계속 집중해서 파고드는 까닭은 이렇습니다. 보통 뉴욕을 그린다고 하면 화려하고 반짝이는 것, 클리셰적이고 대표적인 것을 상상할 것입니다. 그런데 서용선 작가는 그 가운데서도 현장에 가면 보이는 어색하고 독특한 부분을 포착해 도시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지요.

중요한 것은 사회나 시스템이 정한 의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의미로는 담을 수 없는, 나의 눈과 몸의 감각으로 볼 수 있는 더 생생한 의미를 온 힘을 다해 느끼고, 그것을 시각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작가 고유의 의미 체계와 작품 세계를 작가는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서용선 작가는 어떻게 이런 작품을 하게 된 것일까요?
○ 아름다움에는 객관적인 기준이 있을까?
경기도 양평 작업실에서 서용선 작가

서용선 작가의 이야기를 계속 하기 전에 먼저 이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아름다움에 객관적인 기준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쉽게 말하면, 객관적으로 잘생기거나 예쁜 사람이 있다고 보시나요? 저는 시대나 유행에 따라 사람들이 선호하는 얼굴은 있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과 욕망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객관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트렌드에 맞는 얼굴이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성격이나 스타일로 개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아름답게 보이기도 합니다.

제가 왜 외모 이야기를 했냐면, 예술도 과거에는 객관적 아름다움, 눈이 번쩍 뜨일 것 같은 사실성을 추구한 시절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것이 20세기 초반 말레비치를 비롯한 여러 예술가들에 의해 깨어졌고 그 아름다움의 기준은 작가나 관객 등 여러 개별 주체에게 주도권이 쥐어지게 되었습니다.

서용선 작가에게서도 이러한 과정이 있었음을 저는 수개월 전 대화를 통해 엿볼 수 있었습니다. 서용선 작가의 양평 작업실에 방문했을 때, 초기 작가가 그렸던 ‘소나무 시리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서용선, 소나무, 1984, 캔버스에 아크릴, 149 x 181 cm



“1982년 저는 작가로서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때 나온 것이 소나무 그림입니다. 지금은 이 그림이 나의 궁극적 표현 방법으로 맞지 않았다는 걸 알기에 반성을 하지만 당시에는 절박했죠. 그걸 깨달은 계기가 있습니다.

그 때 저는 소나무 그림으로 순수한 형상에 이르고 싶었습니다.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누가 봐도 깜짝 놀라는 명징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파리 선 하나하나를 정말 긴장해 호흡을 멈추고 그으면서 1년 간 작업을 했습니다.

한여름 연구실에서 얼마나 집중을 했는지 선을 긋다 기절해 바닥에 떨어졌어요. 기가 다 빠진거죠. 엉덩방아를 찧고 나서, ‘아 이러면 안 되는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 때 서용선 작가가 추구했던 그림이 바로 (흔히 존재한다고 믿는)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그림이 아니었을까, 추측했습니다. 그러면서 서용선 작가는 군에서 제대하고 그림을 그릴 때 이야기도 들려주었습니다.

“(학원에서) 분명 나의 눈에는 내가 그린 것이 맞는데, 선생님은 자꾸 저의 그림을 고쳐주셨어요. 고쳐진 그림도 그럴 듯 했지만 제가 본 것과는 분명히 달랐지요.

그런데 두 그림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달았어요. 그 분은 키가 크고 저는 앉은키가 작았거든요. 눈높이와 보는 시점이 달랐던 거죠.

사람은 눈꺼풀의 두께 차이로도 보는 것이 차이가 납니다. 즉 개개인이 보는 세상은 다를 수밖에 없는데 그 땐 그것을 어렴풋이만 알았던 거죠.”


개개인이 보는 다른 세상, 이 표현을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즉 모든 사람이 보는 세상은 저마다의 가치가 있는데, 객관적인 아름다움을 주장하는 것은 그 모든 다른 가치를 부정하는 일이 됩니다.

서용선 작가의 ‘소나무’는 (존재하지 않는) 객관적 아름다움에 발을 맞추려는 시도였다면, 작가는 작업실에서 엉덩방아를 찧으며 그게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맞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깨달음 뒤에 서용선 작가의 작품 세계는 한층 더 폭넓은 세계로 뻗어 나가게 됩니다.
○ 문자에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살려내다
① 서용선, 동대문 송씨부인, 2015, 2021, 캔버스에 아크릴, 272 x 123 cm ② 서용선, 영혼과의 대화, 2015, 2021, 캔버스에 아크릴, 265 x 123 cm ③ 서용선, 청령포 그리기, 2015, 2021, 캔버스에 아크릴, 270 x 149cm

앞서 작가가 일련의 경험을 통해 절대적인 객관성, 사회가 정한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탈피하는 과정을 보여드렸습니다. 그 다음에 작가는 이것을 한국의 역사 속 한 장면으로 확장시키기에 이릅니다. 바로 위 작품과 같은 ‘단종 시리즈’가 그것입니다.

작가는 1987년부터 역사에는 왜곡된 기록 밖에 남지 않은 비운의 왕, 단종에 대한 이야기를 추적하며 그것을 작품으로 남깁니다. 시작은 1980년대. 개인적인 슬픔을 안고 우연히 찾은 영월에서 ‘이 물에 어린 왕이 빠져 죽었다’는 말을 듣고 단종에 대해 추적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이 왕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설이나 설화처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고 있었다는 부분입니다. 작가는 이야기가 남은 지역을 직접 찾아 몸으로 느껴보고, 자료를 찾아보며 단종의 이야기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 넣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87년 처음으로 단종 시리즈를 발표합니다.

이후 수십 년 간 이어진 단종 작품에서 왕권이라는 정해진 개념이나 이데올로기에서 외면 받은 사람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뉴욕이라는 이미지의 그림자 아래 저마다의 삶을 사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과, 권력의 그림자에 가린 인간 단종의 모습이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요.

또 그 깊은 곳에는 작가 개인의 아픔도 서려 있습니다.

“어릴 적 동생이 죽었을 때 우리 어머니의 오빠, 큰 아저씨가 조그마한 관을 지게에 지고 앞산을 걸어가는 장면을 5살 때 쯤 봤어요. 어린 아이가 그렇게 죽었으니 부모님은 완전히 넋을 놓으셨죠.

당시 저는 너무 어렸지만 처연한 느낌은 남았습니다. 그 장면은 두고두고 나에게 남았죠. (처음 영월을 찾았다가) 서울로 오는 길에 어릴 적 그 장면이 오버랩 되면서, ‘이런 걸 그림으로 그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용선 작가는 6.25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1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결국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이름도 없이 죽어야만 했던 사람들의 아픔이 작품 세계에 공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되는 대목입니다.

서용선, 콘크리트 골조공사3, 2021, 2022년, 린넨에 아크릴, 351 x 248cm


서용선 작가는 제게 ‘선을 긋는 것은 용기다’라는 말을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작품 세계를 되돌아보며 이 말에서 ‘선을 긋는다’는 것은 결국 빈 종이 위에 선을 긋는 동작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고정관념 속에 미처 조명받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 살아 숨쉬는 생명력, 이런 것들을 커다란 캔버스에 그려내고 그것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이 모든 것이 용기가 아닐까요?

서용선 작가는 ‘개인의 몸이 삶의 중심이며 이것을 기반으로 각자가 자신만의 우주를 구축해 나간다’는 한국의 신자연주의 미술운동에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서용선 작가의 작품을 통해 나를 중심으로 뻗어 나가는 견고한 삶을 살아갈 용기를 가다듬어 보시길 바랍니다.

한 줄로 보는 전시

세상이 규정하지 않은 나만의 감각과 언어도 갈고 닦으면 고유의 아름다움과 가치가 될 수 있다.

추천지수(별 다섯 만점) ★★★☆


전시 정보

정진국의 건축과 서용선 박인혁의 그림

2022. 3. 9 ~ 2022. 3. 28

토포하우스(서울 종로구 인사동11길 6)

작품 수 14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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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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