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선과 악’의 가면을 쓰고 있지 않나요?”…‘지킬 장인’ 류정한

김기윤 기자

입력 2021-12-28 14:58 수정 2021-12-28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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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7월 24일은 한국 뮤지컬의 새 막이 열린 날이다. 뮤지컬의 대중화를 이끈 작품이자 역대 최고 흥행작 중 하나인 ‘지킬앤하이드’의 한국 첫 공연일. 국내 첫 스릴러 뮤지컬을 표방한 이 작품에서 ‘지킬’ 역의 배우 류정한(50)은 김소현, 최정원과 호흡을 맞추며 새로운 전설의 시작을 알렸다. 같은 배역의 조승우를 비롯해 김아선, 소냐 등 출연진이 꾸린 무대는 뮤지컬이 한국에서 자리 잡기 전인 당시에도 큰 흥행 기록을 썼다.

17년 전 첫 무대를 떠올리며 “한 마디로 밑천이 없던 때다. 별 생각없이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만 신경 썼다”던 류정한이 한층 더 섬뜩한 모습의 ‘류지킬’로 다시 나타났다. 탁월한 가창력과 치밀한 연기는 그의 무기. 지킬 역할을 국내서 가장 많이 소화하며 ‘지킬 장인’으로 불리는 그가 내년 5월 8일까지 서울 송파구 샤롯데씨어터에서 ‘지킬앤하이드’의 관객과 만난다. 지킬 역할만 300회를 채우고 싶다는 그의 애정도, 욕심도 가득 담긴 작품이다.

최근 서울 용산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류정한은 “작품이 너무 힘들어 시즌이 끝나면 그만두겠다고 입버릇처럼 이미 여러 번 말했다”며 웃었다. 하지만 “동시에 오랫동안 고민하고 연기했던 ‘지킬’을 완성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더라. 이런 욕심은 모든 배우에게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돌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또 “무대 위에서 몸은 힘들어 죽을 것 같은데 정신은 도리어 맑아지는 이상한 희열을 주는 작품”이라고 덧붙였다.

미국에서 1997년 초연한 작품은 국내 누적 공연 횟수 1400회, 누적 관람객 150만 명에 달하는 대표적 스테디셀러다. 뮤지컬에 관심 없는 이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넘버 ‘지금 이 순간(This is the Moment)’을 남겼다. 인간 내면의 선과 악의 대결을 전면에 내세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원작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를 각색했다. 선한 의사 ‘지킬’은 인간의 선과 악을 분리할 수 있다고 믿는 인물. 스스로에게 약물을 투여해 실험체로 삼으며 두 개의 자아인 지킬과 하이드를 오가며 갈등한다.

특히 극중 ‘대결(The Confrontation)’ 장면에서 시시각각 두 자아를 오가며 180도 돌변하는 1인 2역 연기는 명장면으로 꼽힌다. 이때 객석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손을 쭉 뻗는 류정한은 “결국 ‘당신도 우리도 모두 ’선과 악‘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지 않느냐’고 묻는 게 극의 핵심”이라고 했다.

사실 류정한은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라 인터뷰에 서툴다”지만 좀처럼 언론 인터뷰에 나서지 않기로 유명하다. 지킬로 복귀한 개인적 소회를 털어놓는 것 말고도 뭔가 하고픈 얘기가 더 많아보였다.

“천재지변에 가까운 팬데믹을 겪으니 불안하고 우울한 생각이 들었어요. 무대에 서지 못할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그동안 제가 공연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온 것 같아요. 다시 무대에 서는 것 자체로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앞으로 이런 상황이 또 닥친다면 공연예술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내년이면 데뷔 25주년을 맞는 뮤지컬 대선배로서의 책임감, 고민도 가득했다. 그는 “드라마·영화는 돌파구를 찾아 성장하고 있는데 공연은 언제 다시 멈출지 모르는 불안감을 안고 있다”며 “위험을 무릅쓰고 공연장을 찾는 관객들이 고마우면서도 ‘공연 보러 와 달라’고 쉽게 말할 수 없는 상황이 참 이기적이면서도 어렵다”고 털어놨다. 그래도 “공연계가 희망은 놓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없다”고 덧붙였다.

서울대에서 성악을 전공한 그는 1997년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토니’ 역할로 데뷔했다. 영어 이름을 지금까지 ‘토니’로 쓴다. 이후 ‘오페라의 유령’의 ‘라울’ 역으로 큰 인기를 얻으며, 거의 모든 흥행 작품의 초연을 맡은 입지전적의 경력을 쌓아갔다. 류정한은 “솔직히 운이 좋았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제 목소리가 싫을 때도 많았고 연기도, 발성도 몰랐다. 그저 뮤지컬 초창기라 큰 수혜를 받은 것 같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잘 버텼다’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든다”며 웃었다.

그가 어떻게든 버텨온 세월동안 그를 바라보며 꿈을 키운 이들도 있었다. 현재 뮤지컬 무대서 주연급으로 활동하는 신성록, 카이, 전동석 등 배우는 공공연히 “류정한 선배가 롤모델”이라고 말하는 후배들이다. 최근 함께 ‘지킬앤하이드’에 출연 중인 신성록, 홍광호도 “한결같이 자리를 잘 지키는 형이 참 고맙다”며 말을 건넸다고. 류정한은 “제가 밥을 잘 사줘서 그런 것 같다”며 “저 역시 남경주, 최정원 선배들이 굳건히 무대에 서는 걸 본다. 뮤지컬에 헌신한 그들의 삶에 감사한 마음”이라고 밝혔다.

그의 차기작은 언제나 모든 공연 팬들의 관심사다. 2017년, 2019년 뮤지컬 ‘시라노’의 프로듀서로 한 차례 변신하더니 내년엔 연극배우로 변신한다. 최근 국립정동극장은 연극 시리즈에서 배우 류정한을 주인공으로 한 프로그램 선보이겠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배우 송승환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 시리즈에 이은 기획공연이다. 김희철 국립정동극장 대표가 평소 연극에도 열망을 보이던 류정한을 설득했다.

류정한은 “제 이름을 내건 ‘명배우 시리즈’라고 해서 바로 거절했지만, 다시 뭔가 꿈꿀 수 있다는 생각에 도전했다. 지킬앤하이드 이후 연극 준비에 ‘올인’할 생각”이라고 단언했다. 후보로 올린 2, 3편의 작품 중 현재 최종 선택을 앞두고 있다.

팬과 관객을 위해 노래하던 그에겐 얼마 전부터 더 오래 무대에서 버티며 노래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그는 “네 살인 딸이 극장에서 제 공연을 보려면 아직도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60세까지 노래해야할 목표가 생겼다”며 웃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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