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선이 부른 빈곤, 풍요시대 속 비극과 닮아… 견디는게 인생”

김기윤 기자

입력 2021-09-07 03:00:00 수정 2021-09-07 04:4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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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만선’서 호흡 김명수-정경순
1960년대 가난한 어민 삶 그려내… 한국 사실주의 연극 대표작 꼽혀
“캐릭터 살아있는 작품 반가워… 별난 옛 얘기 같지만 지금과 비슷”


연극 ‘만선’의 주연배우 정경순(왼쪽)과 김명수는 “번역극이나 연극계 최신 유행을 따르는 작품도 좋지만 만선 같은 정통 사실주의 연극도 계속돼야 한다. 인물들 사이에서 켜켜이 쌓여있던 갈등이 터져 나오는 걸 보는 재미가 쏠쏠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어부들에게 ‘만선(滿船)’은 풍요의 상징이다. 물고기로 가득 찬 배를 보기만 해도 자식들 먹일 생각에 배부르다 했던가. 하지만 연극 ‘만선’에서 만선은 풍요만을 뜻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어민의 빈곤과 상실감을 강하게 드러내는 말이 돼버린다. 작품에서 ‘구포댁’ 역의 배우 정경순(58)은 “만선 때문에 이 사달이 나는 거다. 누군가는 만선하려고 용쓰다 또 희생당하고…. 시대가 풍요롭다 해도 어디에나 가난과 비극은 있다”고 말했다.

한국 사실주의 연극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만선’이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올랐다. 1960년대 어민 ‘곰치’의 가족을 통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천승세 작가가 집필한 동명의 희곡은 1964년 초연됐다. 국립극단 70주년 기념작으로 선정돼 당초 지난해 공연이 열릴 예정이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올해로 연기됐다.

주인공 ‘곰치’와 그의 아내 ‘구포댁’은 베테랑 배우 김명수(55)와 정경순이 각각 맡았다. 2일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이들은 “정통 사실주의 연극이 그리워질 때가 있는데 이 작품이 제격이다. 어떤 배우가 해도 이미 절반은 먹고 들어갈 만큼 캐릭터들이 살아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극을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운명이다. 대대로 어부인 곰치는 할아버지, 아버지가 바다에서 죽고, 아들 셋마저 바다에서 잃는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에 순종하듯 만선의 꿈을 접지 못하고 뱃일을 고집한다. 배를 빌려 고기잡이를 하기에 잡아온 물고기는 선주에게 넘어간다. 배 임차료에 빚 부담까지 떠안는다.

“요즘 관점으로 보면 곰치는 참 답답한 사람이죠. 만선한다고 삶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바다만 고집해요. 하지만 그가 절벽 끝에서 기댈 곳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야 해요. 평생 해온 거라곤 그물질뿐인 사람이 과연 다른 삶을 꿈꿀 수 있을까요.”(김명수)

반면 구포댁은 지독한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 정경순은 “여성에게 순종만 강요하던 시대에 도저히 실성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다. 자식을 잃은 한과 뭍으로 나가 살려는 희망을 동시에 품고 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미칠 수밖에 없는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두 배우는 연극무대, 드라마, 영화에서 잔뼈가 굵었다. “모든 연극은 힘들어도 때가 되면 항상 고프다”고 할 만큼 무대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하지만 이들은 이번 작품에서 1960년대 부모 세대의 감성을 이해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정경순은 “옛날에는 자식을 많이 낳은 만큼 많이 죽기도 했다는데 가슴속에 자식들을 한처럼 묻고 사는 게 어떤 감정일지 가늠하기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김명수는 천 작가의 삶을 참고해 곰치 캐릭터를 구체화했다. “천승세 선생은 문인들 사이에서 ‘500년 조선에도 없을 만한 가부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남성성이 강한 분이셨다고 해요. 다만 아내, 자식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은 누구보다 극진했죠. 곰치 캐릭터에 천 작가의 모습이 묻어있다고 봤어요.”

60년 전 작은 어촌에서 기구한 운명을 짊어진 채 사는 별난 이들의 이야기 같지만 작품은 지금 우리에게 묻는다. “‘돈보다 상전이 어딨냐’는 대사가 있어요. 지금 우리 얘기잖아요. 동서고금 우리네 인생은 돈 때문에 비루해도 그걸 겪어내야 하는 게 인생이겠죠.”(김명수 정경순) 19일까지, 2만∼5만 원, 14세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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