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이 걷기만 하는 배우들, 가장 어려운 연기일 것”

김기윤 기자

입력 2021-08-12 03:00:00 수정 2021-08-12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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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 세 번째 공연하는 김아라 연출가
“320벌 갈아입는 ‘내로라 20명’, 실험적 작품임에도 흔쾌히 출연
사회의 암울함 보여주고 싶었다”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 야외무대에 선 김아라 연출가. 그는 “낙천주의적 본성 때문인지 작품에선 늘 긍정과 희망을 말하고 싶다. 그래야 사회도 변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20여 명의 배우가 광장 위를 말없이 걷는다. 이들은 320벌의 옷을 끊임없이 갈아입고 걸어 다니며, 320여 명의 모습을 몸으로 표현한다. 새벽부터 밤까지, 그리고 사계절이 지나도록 또 걷는다. 여전히 말은 없다. 광장을 스치는 바람 소리, 무대 음향만 가득할 뿐. 정적 속에서 약 120분 동안 펼쳐지는 이 정체불명의 퍼포먼스는 김아라 연출가(65)의 비언어 총체극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 그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건네고 싶은 걸까.

한국 연극계에서 이름 자체가 곧 장르인 김 연출가를 10일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에서 만났다. 산과 들판으로 둘러싸인 문화비축기지 내 T2 야외무대는 작품에서 배우들이 거닐 광장이자 무대가 될 곳이다. 그는 “‘청소년 자살률 1위’. 이 말 하나로 한국의 불투명한 미래가 다 설명된다”며 “이 같은 암울한 결과를 낳은 사회의 대립, 갈등, 불안, 외로움 등을 말없이 걷는 사람들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페터 한트케의 동명 원작 희곡을 각색한 이 작품을 김 연출가가 공연한 건 이번이 세 번째. 하지만 모두 제각각이라 할 만큼 매번 새 작품에 가깝다. 1993년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 개관 당시 50명의 관객 앞에서 한 번, 2019년 서강대 메리홀에서 또 한 번 무대를 열었다. 그는 “의상만 320벌이 나오는 원작 텍스트를 보면, 실험이 아닌 이상 도전하기 어려운 작품”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선 언젠가 이 작품을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그 때문에 “천장과 사방이 뚫린 이번 야외무대는 작품 구현에 최적”이라며 흡족해했다.

작품에는 20대부터 80대 원로배우, 무용수 등 다양한 배우들이 출연한다. 권성덕 정동환 정혜승 정재진 등 원로 배우를 비롯해 무용가 박호빈, 성악가 권로, 비디오아티스트 박진영 등이 나온다. 특별출연자로 박정자 김명곤 남명렬도 참여한다. 그는 “모시기 힘든 분들도 실험적 작품에 흔쾌히 출연하기로 했다. 연극계에서 제가 꽤 잘 살아온 모양”이라며 웃었다.

정동환은 극에서 노숙인의 겉모습을 하고 광장에 멈춰 걸어가는 이들을 관찰한다. 김 연출가는 “직접 언급하진 않는데 사실 그의 정체는 땅에 내려온 천사다. 고립된 상태에서 그는 자신을 성찰하고, 사람들을 관찰하고 인간에게 연민과 그리움을 느끼는 역할”이라고 했다. 이어 “본능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익숙한 배우들에게 지나가는 찰나를 그저 진솔하게 연기해달라고 주문했다. 아마도 가장 어려운 연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1986년 데뷔 후 동아연극상, 백상예술대상을 휩쓴 그는 당시 ‘김아라’라는 이름이 실험과 파격을 의미할 정도로 독창적 연출세계를 구현해 왔다. 1997년 경기 안성시에 야외극장을 설립해 ‘복합장르음악극’을 완성했고 해외 연극계와 교류하며 ‘침묵극’ 장르도 선보였다. 극단 무천의 대표이자 ‘혜화동 1번지’의 창립 멤버다. 그는 “관객 절반은 좋아했지만 나머지 절반은 늘 제 작품을 싫어했을 정도로 평이 갈렸다. 지금도 ‘작품이 좋으면 관객은 온다’는 신념엔 변함이 없다”고 했다. 35년간 연극판을 지킨 비결로 그는 자신의 충동을 꼽았다.

“두려움 없이 새로움과 이상향에 계속 도전하게 만들었던 제 예술적 충동을 사랑해요.”

14일부터 22일까지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 T2, 전석 5만 원, 14세 이상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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