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H 수법’ 투기에 농민 피해… “보상노려 땅갈아엎자 과수원 침수”

광명=김태성 기자

입력 2021-05-20 03:00 수정 2021-05-20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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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시흥 일대 불법행태 다시 고개

막무가내식 성토 작업에 물바다 된 과수원 17일 오후 경기 광명시 가학동의 한 사과나무밭(위쪽 사진)이 흙탕물에 잠겨 있다. 인근 농민들은 지난해 6월 인근 밭을 매입한 외지인이 “비닐하우스를 짓겠다”며 나무를 뽑고 성토 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위 사진). 이후로 비가 조금만 내려도 심각한 침수 피해를 겪고 있다. 독자 제공·광명=김태성 기자 kts5710@donga.com

“여름에 폭우가 와도 물에 잠긴 적이 없는데, 외지인이 옆에서 땅을 갈고 엎고 난 뒤 다 망해버렸어요.”

17일 오후 경기 광명시 가학동에 있는 한 과수원. 30년 넘게 과일농사를 지어 온 A 씨(60)는 요즘 말끝마다 한숨이 가득하다. 올해도 애지중지 사과나무 300여 그루를 가꿨지만 한 해 농사를 망칠까 봐 걱정이 태산이다.

A 씨 속이 타들어가는 건 옆 농지 외지인 때문이다. 지난해 6월 과수원 바로 옆에 있는 농지(3421m²)를 매입했던 외지인이 올해 신도시 지정 뒤 심어져 있던 나무를 싹 베어냈다. 최근 “비닐하우스를 짓겠다”며 굴착기 등을 동원해 농지를 돋우는 성토(盛土) 작업도 벌였다.

이때부터였다. 배수로가 막혀 물이 빠지지 않더니 조금만 비가 내려도 과수원에 흙탕물이 들어찼다. 발목 이상 물에 잠긴 것도 여러 차례. A 씨는 “사과나무는 뿌리가 썩으면 아예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 보상 투기를 벌이는 외지인들 때문에 농민들만 죽어나고 있다”고 토로했다.

올해 3월 한국토지주택공사(LH) 전·현직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 의혹이 일며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던 경기 광명·시흥 신도시지구 일대. 정부가 불법 행위를 뿌리 뽑겠다며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지만 최근 다시 투기 세력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있다. 특히 지방자치단체의 단속이 미치기 어려운 맹지 등에서 보상을 노린 투기 행태가 곳곳에서 목격됐다.

현행법상 신도시지구로 공고된 뒤 지구 내에서 성토 작업을 벌이거나 나무를 심고 베는 등의 행위는 지자체의 허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토지 보상 가격을 높이려는 목적에서 이 같은 행위를 벌이는 ‘보상 투기’를 막기 위해서다. 위반하면 공공주택특별법에 따라 1년 이하 징역이나 1000만 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진다. 다만 농업을 위한 토지 이용에 한해 50cm 이하 성토 작업이나 농업용 비닐하우스 설치 등은 지자체 허가 없이 가능하다.

A 씨 과수원 옆 농지도 올해 2월 24일 발표된 광명·시흥 신도시지구 내에 포함되는 만큼 예외가 아니다. 주민들에 따르면 해당 외지인은 주민들이 불만을 제기하자 “50cm 이하 성토 작업은 법적 문제가 없다”며 큰소리쳤다고 한다. A 씨처럼 고구마를 기르던 텃밭이 피해를 입은 농민 B 씨(62)는 “뭔가 관련법을 다 꿰고 있는 사람 같았다. 오히려 배짱을 부려서 당황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주민들 주장대로 2월 24일 이후 나무를 지자체 허가 없이 베어냈다면 불법이 맞다. 광명시 측은 “해당 토지에 대해 벌목 허가를 내준 적이 없다. 법 위반 소지가 있는 만큼 현장조사를 나가 사실관계를 따져보겠다”고 했다.

해당 신도시지구에서 편법·불법 행위가 의심되는 토지는 이곳 말고도 여럿이다. 주민 제보를 받고 둘러본 노온사동의 한 물류업체 창고 뒤 농지에는 한눈에도 심은 지 얼마 안 되는 묘목 100여 그루가 빼곡했다. 일대에서 일명 ‘사장’이라 불리며 투기를 벌여 17일 부패방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이 신청된 LH 직원 강모 씨가 자주 쓰던 수법이다.

서울 시민이 소유주인 이 땅은 등기부등본에 논으로 돼 있지만 현재 흙을 쌓아올려 밭으로 바꿔놓았다. 한 주민은 “길도 없는 맹지라 들어가기도 힘든데, 언제 와서 나무를 심었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했다. 이 역시 2월 24일 이후 나무를 심었다면 공공주택특별법 위반이다. 이 밖에도 최근 설치됐지만 실제 이용한 흔적이 없는 비닐하우스나 성토 작업을 벌였지만 농사를 짓진 않는 땅 등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지자체 인력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현재 경기 광명과 시흥에서 제한 행위 현장 단속을 담당하는 직원은 각각 4명과 2명뿐이다. 넓은 지역을 적은 인원으로 돌다 보니 외진 지역일수록 한계가 있다고 한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현장 단속 인력을 무작정 늘리는 것도 행정력 활용 측면에서 문제”라며 “공공주택특별법상 제한 행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 보상 투기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광명=김태성 기자 kts571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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