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의 시공간… 그 당시 살았을 법한 여성 상상했죠”

김기윤 기자

입력 2021-05-04 03:00:00 수정 2021-05-04 04: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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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OIL’ 출연하는 배우 남기애
석유 연대기 그린 영국 희곡 원작
박정희 연출가가 국내 초연 맡아
소리꾼 이자람과 고부관계 연기


남기애 배우는 “연극 ‘오일’은 여성을 여성의 시각으로 조명한 게 아니라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관점에서 그렸다. 음미할수록 더 재미있다”고 했다. 더줌아트센터 제공

석유를 에너지원으로 쓰기 시작한 19세기 말. 인간은 석유가 주는 뜨거움을 갈망했고 이를 쟁취하기 위해 지독하게 싸웠다. “신은 하필 미개한 중동에 석유를 남겨줬다”는 극 중 영국 장교의 대사처럼 제국주의 국가들은 석유를 얻기 위해 침략도 정당화했다.

1일 개막해 9일까지 서울 용산구 더줌아트센터서 국내 초연하는 연극 ‘OIL(오일)’은 19세기 말부터 석유가 고갈될 것으로 예상되는 2051년까지의 역사를 두 모녀를 통해 그린다. 영국에서 주목받는 극작가 엘라 힉슨의 희곡이 원작으로, 한국 연극계 대모 박정희 연출가가 참여한다.

계급주의, 여성주의, 제국주의, 환경까지 광범위하게 다룬다. 극단 ‘풍경’의 ‘작가展’ 3부작 중 마지막 극으로, 소리꾼 이자람이 어머니 ‘메이’ 역을 맡아 정극에 도전했다. 딸 에이미 역은 박정원이 맡았다. 국악 팝 밴드 이날치의 프로듀서 겸 베이스를 맡은 장영규가 음악을 담당해 화제가 됐다.


풍부한 서사를 품은 작품에서 전반적인 연기 톤을 잡고 배우들을 이끈 건 베테랑 남기애 배우(60)다. 그는 앞서 프로젝트의 첫 작품인 ‘장 주네’서 어머니 역을 맡았고 이번에는 엄격한 시어머니 ‘마 싱거’를 연기한다. 1부에서 열연한 뒤 마지막 5부에 마치 환영(幻影)처럼 등장한다. 배우 박명신과 번갈아 역을 소화한다.

최근 더줌아트센터서 만난 남기애는 “여성의 모습을 방대한 시공간에 녹여낸 극은 볼수록 매력적이다. 개인적으로 프로젝트를 마감하는 작품이라 의미가 크다”고 했다. 작품은 영국 콘월과 햄프스테드, 이란 테헤란, 이라크 바그다드 등 4개 도시와 200년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삼았다. 그는 “인물의 구체적 나이보다 각자 그 시대에 살고 있을 법한 여성의 모습을 연기했다”고 밝혔다.

극 중 며느리가 “엄마는 아기에게 가장 좋은 걸 줘야 해”라고 말하자 시어머니는 “엄마는 가족 모두에게 가장 좋은 걸 줘야 한다”고 맞받아친다. 시어머니 역은 전통적 어머니상이자 고향을 상징하는 존재다. 남기애는 “기댈 곳 없을 때 찾는 어머니 이미지를 떠올렸다. 인간이 골몰하는 석유도 땅과 자연에서 나오는 산물인데 모든 걸 퍼주는 어머니와 닮았다”고 덧붙였다.

첫 호흡을 맞춘 이자람에 대해 그는 “서 있기만 해도 믿음이 가고 에너지가 정말 큰 배우”라며 “아직 어머니로서 경험이 없는 그에게 자녀를 키워본 현실적 경험을 들려줬더니 이를 영민하게 잡아내 소화했다”고 했다.

중앙대 연극영화과 출신인 남기애는 졸업 후 결혼, 출산으로 꽤 오랜 시간 무대와 담을 쌓고 살았다. 서른여섯이던 1997년에야 뒤늦게 데뷔했다. “잊고 살던 무대에 선다니 얼마나 좋았던지….”

육아와 연극을 병행하던 그는 6∼7년 전부터 방송, 영화에도 도전했다. 송혜교가 “실제 제 어머니보다 더 많이 보는 것 같다”고 할 정도로 송혜교의 어머니로 대중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그는 “연극에선 늘 착한 엄마를 맡았는데 방송에선 조금은 독특한 엄마를 맡아 좋았다”고 했다.

공연 초반, 후반에 등장하는 그는 준비 과정에서 후배들의 모습을 객관화해 바라봤다. “작가는 이 순간 왜 이 인물을 등장시켰나”를 떠올리며 제작진, 연출과 상의를 거쳤다. 불필요한 장면을 걷어내기도 했다. 배우라면 조금이라도 오래 무대에 서고픈 건 인지상정. 논의 끝에 그는 결단을 내렸다. 마치 모든 걸 퍼주는 어머니처럼. “제 분량을 제일 많이 줄이기로 했어요.(웃음) 작품을 위해서라면….”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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