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이에게 모든것이 되게 하소서”… 바지 한벌로 18년 ‘청빈한 삶’

김갑식 문화전문 기자

입력 2021-04-28 03:00:00 수정 2021-04-28 08: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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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추기경 선종 1931~2021

얼어붙은 남한강을 걸어서 건너는데 바로 뒤에서 얼음이 깨졌다. 뒤따라오던 동료들이 몰살됐다. 앞에 가던 동료가 지뢰를 밟고 숨져가는 것을 그대로 지켜봐야 했다.

6·25전쟁은 27일 선종한 정진석 추기경의 행로를 바꾸었다. 1931년 서울의 독실한 가톨릭 신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중앙고를 거쳐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해 과학자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전쟁 때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돼 삶과 죽음이 갈리는 순간들을 겪은 것이 그를 사제의 길로 이끌었다. 1960년 성신대(지금의 가톨릭대)에 들어간 그는 1961년 사제품을 받고 서울대교구 중림동 본당 보좌신부로 사제의 첫발을 내디뎠다.

정 추기경은 1970년 청주교구장을 맡은 뒤 한여름에 에어컨을 켜지 않았고, 바지 한 벌을 18년 동안 입을 정도로 청빈하게 생활했다. 식사 초대를 못 하는 사람이 소외감을 느낄까 봐 일절 초대를 받지 않았고, 식사는 항상 교구 내 식당에서 했다. 그는 신자들이 “생활비에 보태 쓰라”며 한 푼 두 푼 내놓은 돈을 40년 동안 모아 1999년 5억 원을 꽃동네 현도사회복지대에 장학기금으로 쾌척했다.

1998년 서울대교구장 착좌(着座)에 이어 2006년 한국의 두 번째 추기경으로 임명된 정 추기경은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가톨릭의 전통을 지켜낸 신앙의 수호자였다. 민감한 현실정치에는 입장 표명을 삼갔지만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의 인간 배아줄기세포 연구와 정부의 사학법 개정안에 대해 비판하는 등 사회적 문제에 대해 일관된 목소리를 냈다.

2010년 일부 시민단체가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4대강 개발에 반대한 것처럼 여론몰이를 하자 정 추기경은 간담회에서 “주교회의의 결정은 찬성과 반대의 입장이 아니었다. 난개발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면서 제대로 잘 개발해 달라는 취지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의 목소리가 큰 분위기에서 쉽지 않은 발언이었다. 정 추기경의 발언은 초유의 추기경 용퇴 주장과 이에 맞선 서울대교구 사제들의 반발로 이어졌다.

정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과 함께 평양교구장 서리도 맡아 매일 밤 북한에서 어렵게 신앙을 지켜가고 있는 신자들을 위해 기도했다. 2007년 평양교구 설정 80주년 행사 준비 등 평양교구 재건을 위해 힘썼다.

2012년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난 뒤 서울 종로구 혜화동 가톨릭대 성신교정(신학대학) 주교관에 머물며 저술활동에 매진해왔다. 이임 미사의 한 대목에서 서울대교구에 대한 깊은 애정과 소탈한 성품을 엿볼 수 있다.

“여기(명동대성당)에서 (가톨릭의) 7개 성사 중 (혼인성사와 병자성사를 뺀) 5개를 받았는데….(좌중 웃음) (떠나는) 감회를 말로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들(교구 사제와 신자들)이 일러주는 대로 따라가려고 노력하다 보니 14년이 휙 지나갔네요.”

교회법의 권위자인 정 추기경은 작은 것에서부터 신앙과 삶의 일치를 추구한 약속과 원칙의 사제였다. 부제(副祭) 시절 룸메이트였던 고 박도식 신부와 매년 책을 내기로 한 약속을 어김없이 지켜 지난해까지 수십 권의 교리서와 에세이를 출간했다. ‘참신앙의 진리’와 ‘교회법 해설’ 개정판이 마지막 약속이 됐다.

청주교구장으로 임명될 당시 그가 세운 사목표어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게 하소서’였다.

“사제는 우리말로는 ‘신부님’이지만 서양에선 보통 ‘아버지(father)’라 부르는데,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땐 ‘이제 아버지 노릇을 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책임감이 무거웠다. 그 책임감도 잠시, 사람들로부터 시중과 존경을 받으며 지내다 보니 처음 느꼈던 그 맘도 사라지더라.” 이런 점을 의식해 ‘사제’를 빼놓는다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기 위해 노력했다는 게 그의 고백이다.

정 추기경은 생전에 연명치료를 받지 않고, 장기와 각막을 기증하겠다는 글을 직접 써두었다.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남김없이 내어주었다.

영혼의 농부, 천상의 농부가 되다
신달자 시인의 ‘정 추기경 추모’

신달자 시인
정진석 추기경님께서 선종하셨습니다. 마지막까지 ‘나’가 아니라 ‘너’를 생각하신 모습에 다시 울컥 목이 멥니다. 이 글을 쓰는 제 손이 떨립니다. 무엇을 써야 할지 암담한 제 마음이 저립니다. 누구에게나 오는 순연한 결과이지만 추기경님이 이미 이 지상의 분이 아니라는 생각은 제 온몸을 아리게 합니다. 물론 예수님 곁으로 가셨으니 행복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영원한 안식보다 부족한 저희들로부터 먼 곳에 계신다는 것이 더 안타까운 것은 아무래도 믿음이 미숙한 제 생각일지 모르겠습니다. 벌써 그리워지는 분입니다. 누구보다 의연하셨지만 누구보다 외로우셨을 추기경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추기경님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온전히 자신을 바쳐 예수님을 세계에 알리는 일을 꾸준히 세심하게 쉬지 않고 해 오신 분입니다. 누구보다 청빈하며 몸을 낮추고 가톨릭 정신과 예수님을 성스럽게 가르친 분이셨습니다.

죽음은 그 사람의 삶에 불을 밝히는 일입니다. 평상시 보았는데도 안 본 것처럼 스쳐 지나간 작은 일까지, 그가 눈을 감으면 그 일이 중심에 불을 켜는 것같이 밝아집니다. 추기경님을 처음 뵌 것은 2008년 11월 평화방송의 이스라엘 성지순례 여행에서였습니다. 모든 이에게 어렵지 않고 자연스러운 수평적 분위기를 만들려 매우 노력하셨지요. 어려운 분이 분위기가 기울어지지 않게 하시려는 모습을 보고 감동했던 일들이 기억납니다.

지난해 7월 교계 신문의 주교 수품 50주년 인터뷰를 위해 서울 혜화동에서 뵈었습니다. 6·25전쟁 때 옆 사람들이 죽고 추기경님만 살아남았다고 하셨죠. 추기경님은 “그때 왜 자신을 살렸는가”를 철저히 삶을 통해 답하셨던 충실한 하느님의 제자였습니다. 깊고 넓고 따뜻하셨습니다.

추기경님은 쉴 새 없이 일해 온 ‘영혼의 농부’였습니다. 영혼을 밭갈이하며 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키우고 거두는 농부, 그 험난한 신앙의 박토를 일구신 농부, 예수님의 말씀을 땅으로 삼으신 농부였습니다. 동시대에 함께 살았던 것은 제게 큰 선물이었습니다. 이 생각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겠습니다.

추기경님은 인생이라는 먼 길을 가는 우리에게 최종 목적지와 주의사항을 알려주는 길잡이가 성경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추기경님이야말로 우리에겐 그 길잡이며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등대지기셨습니다. 누가 쳐다보지 않아도 늘 불을 켜고, 바닷가에 외롭고 당당하게 서 있는 등대.

추기경님! 저는 추기경님이 너무나 먼 하늘 어디로 떠나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울, 부산처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저희들을 위한 기도를 하고 계실 것을 확신합니다. 저희도 기억할 것입니다. 그 고귀한 흔적은 성경처럼 영원히 남아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가수 최희준의 ‘하숙생’을 부르셨는데 음정·박자가 하나도 틀리지 않아서 많은 박수를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추기경님이 가신 곳은 우리 다 알고 있지요. 빛나는 곳이라는 것을요. 사제로 태어나 사제로 떠나신 분, 정진석 추기경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가시는 길에 성모님이 마중하시는 그림을 떠올리며 두 손을 간절히 모읍니다.

김갑식 문화전문 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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