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이렇게 누워 모든 활동을 거부하다”

김기윤 기자

입력 2021-03-17 03:00 수정 2021-03-17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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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X의 비극’ 주연 김명기 배우
일상에 지친 중년의 X세대 상징
공연 100분 내내 찬바닥 누워 연기
“삶에는 다 비극이 있는 것 같아…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지 않겠나”


주인공 ‘현서’를 연기한 배우 김명기가 출근 복장인 회색 정장을 입은 채 무대에 누워 연기하는 모습. 바위 등 소품은 현서와 가족을 짓누르는 삶의 무게를 상징한다. 김명기는 “누워서 집중력이 흐트러질 땐 날 보고 있을 관객들을 떠올린다”고 했다. 국립극단 제공

외줄타기 하듯 위태롭게 출퇴근만 반복하던 마흔네 살의 남성 현서. 가장의 무게가 짓누르는 일상, 고단한 직장생활에 지쳐버린 그는 누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자 극을 관통하는 주제를 첫 대사부터 쏟아낸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내가 이기려면 누군가가 패해야 한다.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뒤처지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려고 매 순간 수많은 사진을 찍고….” 이어 “그래서 나는 여기 이렇게 누워서 모든 사회적 활동을 거부한다”고 선언한다.

현서 역의 김명기 배우(41)는 이윽고 진짜 무대 한복판에 대(大)자로 누워버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몸은 무대 아래로 뿌리를 내리듯 꼼짝달싹 않는다. 누워야 하는 당위를 설명하는 첫 3분을 빼고 공연 시간 100분 내내 누워서 허공을 바라보고 연기한다. 뒤통수가 눌려 납작해질 정도다. 가끔 옆으로 돌아누우려 몸을 꿈틀댈 뿐.

독특한 형식의 연극 ‘X의 비극’은 경쟁 사회에서 쓰러지는 자와 버티는 자의 이야기를 그린 국립극단 신작이다. ‘X’는 인터넷이 생겨나 풍요 속에 20대를 보낸 뒤 외환위기, 닷컴버블 등 풍파를 겪고 어느덧 중년이 된 X세대를 뜻한다. 동시에 미지수 ‘X’를 상징한다. X의 자리에는 현재를 사는 누구든 대입할 수 있다.

작품은 뻗어버린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주변인을 냉소적으로 조망한다. 극의 매력은 비극이 정점에 달하려는 순간 인물들이 역설적으로 희극적 대사를 뱉는 것. “정자와 난자가 만날 빌미를 주지 말았어야 했다”며 현서가 자신을 저주스러운 세상에 태어나게 만든 어머니를 질책하면, 어머니는 “지금 눕지 말고 정자일 때부터 드러눕지 그랬냐”고 응수하는 식이다. 회색빛의 건조한 무대는 시종일관 딱딱한 우리 현실을 드러낸다. 이유진 작가의 글에 윤혜진이 연출을 맡았다.

출근하자마자 눕고 싶고, 누워서 아무것도 하기 싫은 게 우리네 소망. 그런데 몇 달씩 누군가 누워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희극과 비극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극은 점차 비극으로 물들어간다. 처음엔 “회사에서 누워 있으라고 시켰냐, 일종의 재택근무냐”며 대수롭지 않아하던 현서의 아내도 이내 생계의 위협에 직면한다. 현서의 친구 우섭과 외도를 시작하더니 그에게 아들 교육비를 부탁한다. 주인공의 고3 아들과 어머니도 마치 식물이 된 듯한 현서의 모습에 고뇌하긴 마찬가지. 한 가정이 금세 무너져 내린다. 이 상황을 누워서 목도한 현서는 “그래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며 영혼이 빠져나간 듯 읊조린다.

2005년 데뷔한 김명기는 배우 인생 16년 만에 현서 역으로 단독 주연을 꿰찼다. 극단 마방진의 1기 단원으로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스카팽’ 등을 거쳤다. 최근 국립극단에서 만난 그는 “인간관계, 가정, 직장 스트레스에서 오는 ‘번아웃’은 X세대 끝자락에 걸친 저를 포함해 모두 공감할 이야기”라고 했다. 극의 형식에 대해 “몸이 가려워도 긁지 못하고 무대 바닥의 한기(寒氣)를 견디는 게 힘겹다”면서도 “몸을 고정한 채 대사와 표정만으로 뻗어내는 ‘눕는 연기’의 묘한 희열이 있다”고 했다. 다만 “대사가 없을 때 밀려오는 졸음을 참는 정신력도 필수”라며 웃었다.

살지도 죽지도 못해 눕기를 택한 현서에 대해 김명기는 “삶에는 다 비극이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린 살아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과연 현서는 몸을 일으킬 수 있을까.

4월 4일까지, 서울 용산구 국립극단 소극장 판, 전석 3만 원.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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