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동해남부선 추억을 싣고…‘해변열차’ 타고 떠나볼까[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전승훈 기자

입력 2021-02-06 18:00 수정 2021-03-15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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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해운대는 대표적인 여름휴양지다. 그러나 겨울에도 따뜻한 해변을 호젓하게 걷고, 해외여행이 어려운 시기에 이국적 야경을 감상하는 경험은 특별하다. 녹슨 폐선 철로와 원자력발전소가 보이는 풍경, 옛 공장을 재생한 카페와 현대 건축물 투어도 눈길을 끈다. 자연적으로 형성되고, 사람들이 걸어 온 길에는 예술이 쌓인다. 여행지에서 문화의 향기를 찾아가는 ‘아트로드’를 부산 해운대 해변 길에서 시작한다.》


바다열차는 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국내에서 해변과 가장 가까운 열차로는 강릉~정동진~삼척을 잇는 바다열차가 으뜸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말 동해와 남해의 해변풍광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새로운 해변열차가 등장했다.

부산 해운대 미포와 청사포, 송정에 이르는 4.8km에 조성된 ‘블루라인 파크’. 동해남부선 옛 철로를 재생한 해변열차다. 바다가 보이는 통창을 향해 극장처럼 가로로 길게 2열로 만든 좌석에 앉으면 와이드스크린 영화를 보는 듯한 스펙터클이 쏟아진다. 해운대의 엘시티 고층빌딩부터 해송 숲, 청사포의 횟집과 송정해수욕장의 서핑족…. 날씨 좋은 날에는 멀리 쓰시마섬이 보이기도 한다. 전기 배터리 충전으로 시속 15km로 운행되는 이 열차(왕복 1시간)는 마치 유럽 도시에서 운행되는 트램 같은 분위기다.

해운대 블루라인 바다열차 내부에서 바라본 해변 풍경

1935년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동해남부선(부산진~울산~경주)은 오랜 시간 동안 해운대, 경주 등의 관광지를 찾는 추억의 철길로 각광을 받았다. 이른 봄에 조선 쪽파(실파)로 향긋한 봄 향기를 전해주었던 ‘동래파전’이 유명해진 것도 동해남부선 덕택이다. 넓은 파밭으로 유명한 기장에서 난 쪽파를 상인들이 기차를 타고 동래역으로 실어 날랐고, 각종 해물과 쪽파가 어우러진 동래파전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바닷가 절벽을 굽이굽이 달리던 동해남부선의 옛 철길은 2013년 장산 내 터널을 통과하는 복선전철이 뚫리면서 폐선됐다. 이후 영화 ‘건축학개론’처럼 철로 위를 걷는 연인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그로부터 7년 후. 이곳엔 다시 바다열차가 들어섰다. 강원도 탄광지역이나 북한강 지역에선 폐선 철도에 레일바이크를 주로 놓았지만, 이곳에는 해변열차, 스카이캡슐, 덱로드 산책로 등 3차원으로 해안절경을 즐길 수 있는 철길공원이 조성됐다.

블루라인 해변열차

블루라인 해변열차

이 길은 바다열차만 타고 감상하기엔 아쉽다. 이곳의 해안 숲길은 갈맷길, 해파랑길, 문탠로드라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걷기 명소이기 때문이다. 바다열차와 산책로를 구간별로 오가며 다양하게 감상하는 것이 좋다.

영화 ‘해운대’에서 하지원이 횟집을 운영하던 미포는 ‘누워있는 소’ 형상인 와우산의 꼬리(尾)에 위치한 포구다. 이곳에서 달맞이고개 방향으로 언덕을 오른다. 해송이 울창한 숲길의 이름은 문탠로드다. ‘선탠’이 아니라 은은한 달빛에 젖는 길이라는 뜻이다. 이 길에 있는 해월정은 동해와 남해를 가르는 경계선이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바다와 해송 숲 사이로 달리는 해변열차와 4인승 캡슐이 마치 스위스의 산 속 풍경을 연상케 했다.

해운대 달맞이 고개 문탠로드에서 바라본 ‘블루라인’ 바다열차와 4인승 캡슐

달맞이고개 터널에서 광안대교 방향의 풍경을 즐기고, 청사포에서 몽돌해변의 ‘와르르’하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잠시 쉬어간다. 바다 위로 70m 정도 길게 나와 있는 청사포의 다릿돌 전망대는 바닥이 투명한 유리창으로 돼 있어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끝까지 가기 힘들다. ‘푸른 뱀(靑蛇)의 전설’이 이어져오는 청사포 다릿돌은 원래 용왕제를 지내던 곳.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다릿돌 전망대는 휘어진 뱀 모양으로 금방이라도 바다에 뛰어들 듯하다. 청사포의 감성 넘치는 버스정류장과 빨간색, 흰색 등대는 인스타그램의 사진 찍기 명소다.

청사포 등대

청사포 다릿돌 전망대

해변열차의 종착역인 송정역은 동해남부선의 간이역이었다. 경쾌하고 소박한 모양의 송정역(1941년 건축)은 출입문을 박공지붕 중심선에 맞추지 않고 왼쪽으로 치우치게 배치했다. 세 쪽의 작은 창도 왼쪽으로 치우쳐 있다. 이를 보고 어느 건축가는 “사람으로 치면 입 한쪽을 씩 올리며 반갑게 웃는 형상”이라고 했다. 철길 옆에 있는 노천대합실(1967년 건축)도 눈길을 끈다. 천장의 삼각 트러스와 기둥 윗부분의 장식이 특히 매력적이다. 아르누보 스타일 철제 장식으로 고품격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송정역 옛 역사 건물과 노천대합실

송정역 이후로도 바닷길은 기장군 방향으로 계속 이어진다. ‘갈맷길 1코스’로 불리는 기장 해안 길은 요즘 가장 핫한 카페 명소로 뜨고 있다. 유현준, 곽희수 등 전국적인 인지도를 자랑하는 스타건축가들이 디자인한 ‘로쏘’ ‘웨이브온’ ‘메르데쿠르’ 등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카페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2018년 한국 건축대상 본상을 수상한 ‘웨이브온’은 두개의 박스형 공간이 엇갈리게 교차하면서, 임랑해수욕장의 해암(海巖)과 절벽, 소나무 숲이 어우러진 바다풍경을 360도로 조망할 수 있는 카페다. 옥상에 올라가보니 고리원자력 발전소가 보이는 뷰에도 젊은 연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커피를 마시고 있다. 세련된 건축물이 기피시설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지역의 분위기를 하루아침에 바꿔놓았다.

기장 해안길의 카페 ‘웨이브온’

고리원자력 발전소 뷰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기장 해안 길을 걷다보면 힐튼호텔 아난티코브 리조트도 만난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콘도이지만 최근 문을 연 미디어아트 갤러리 ‘캐비네 드 쁘아쏭’(Cabinet de Poisson)은 예약을 통해 일반인도 관람할 수 있다(성인 1만5000원). 프랑스어로 ‘물고기 연구실’이란 뜻의 이 갤러리에 들어서면 꽃이 그려진 흰색 가운을 입은 두 명의 연구원이 안내를 해준다. 미디어 아트를 통해 관람객이 터치를 하면 빛과 물, 불, 바람이 번져나가고, 꽃과 폭포가 쏟아지는 환상의 세계를 걷다보면 마치 영화 ‘아바타’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기장 아난티코브의 미디어아트 갤러리 ‘캐비네 드 쁘아쏭’



● 도시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부산 해운대는 산과 바다, 강이 어우러진 천혜의 절경이지만, 미래도시를 방불케 할 만큼 초고층 빌딩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군용 비행장이 있었던 수영만 일대에 조성된 센텀시티는 그야말로 현대 건축의 경연장이다. 영화의전당, 신세계백화점, 벡스코, 부산시립미술관까지 건축물과 미술품을 감상하는 것도 해운대 여행의 묘미다. 정성식 해운대문화관광해설사와 정규섭 부산건축문화해설사와 함께 2시간 가량 센텀시티를 답사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개·폐막식이 열리는 영화의전당은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처럼 해운대 예술의 랜드마크적인 건물이다. 독일 뮌헨의 BMW센터를 지은 쿱 힘멜브라우가 설계한 해체주의 건축물인 영화의전당은 바닥부터 건물 전체가 현무암으로 장식돼 있다. ‘비프힐’ ‘시네 마운틴’이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건물 전체가 땅에서 솟아난 화산처럼 보인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캔틸레버(외팔보)’ 지붕을 버티고 서 있는 ‘더블콘’ 건물은 아이스크림 콘 2개를 엎어놓은 듯한 모양이다. 더블콘과 시네마운틴은 우아한 곡선의 통로로 공중에서 이어지는데, 원래는 유리로 만들어 부산영화제 참석배우들이 관객들 앞에서 걷는 용도로 설계했지만 건축법상 불가능해 알루미늄판을 씌워놓았다고 한다. 영화의전당 앞에 서 있는 커다란 조각품은 앞에서 보면 여인 형상인데, 옆에서 보면 부산을 상징하는 갈매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드니오페라 하우스처럼 해변에 홀로 서 있으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을 이 건축물은 주변에 워낙 고층빌딩이 많이 들어서는 바람에 생각보다 잘 눈에 띄지 않아 아쉬웠다. 방추성 영화의전당 대표는 “영화의전당과 수영강변의 APEC나루공원 사이가 자동차 도로로 단절돼 있다”며 “도로를 지하화하고 연결시킨다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관객들에게 영화의 감동을 더욱 느끼게 할 공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의전당과 조각품

영화의전당과 조각품

영화의전당과 조각품

영화의전당을 나오면 세계 최대의 매장면적을 가진 백화점이라는 기네스북 인정을 받은 신세계백화점 건물이 나온다. 내외부가 소라의 형상처럼 부드럽게 말려올라가는 독특한 형태다. 특히 내부에도 1층부터 9층까지 비어있는 ‘보이드(Void) 공간’이 동그랗게 말아 올라가며 모습은 운율을 느끼게 한다. 신세계백화점을 개발하면서 온천수가 터져 조성한 스파랜드를 비롯해 내부에는 미술전시를 하는 갤러리와 극장, 영화관이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신세계백화점 내외부

이처럼 부산의 건축물에는 소라, 갈매기, 새, 파도, 산과 같은 부산의 자연환경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인이 많다. 센텀시티의 대표적 건축물인 벡스코(BEXCO) 전시장은 날아가는 새의 날개를 형상화한 모양이다. 또한 벡스코 오디토리움 건물은 앞에서 보면 배에 물이 튀는 형상의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 거대한 상선이 파도를 헤치고 운항하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벡스코 오디토리움과 벡스코전시장, 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과 벡스코 전시장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공간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지어진 현대미술작가 이우환의 개인미술관이 있다. 이름은 ‘이우환의 공간’이다. 검은색 유리와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 뿐 아니라 잔디밭에 지어진 야외 전시장까지 작가가 직접 디자인한 공간이다. 이 곳에는 ‘선으로부터’ ‘점으로부터’ 등 13점의 회화 작품과 돌과 금속으로 된 조각까지 현대미술 작가 이우환의 예술을 총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부산 해운대의 주요 건축물을 탐방할 때는 해운대구청이나 부산건축제사무국에 요청을 하면 전문적인 해설을 들을 수 있다.

‘이우환의 공간’ 야외 잔디밭에 전시돼 있는 이우환의 작품 ‘회의’. 가운데 금속으로 된 책상에 돌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무언가를 논의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밤이 되자 해운대에는 엘시티 건물 위로 보름달이 떠올랐다. 해변에서 바라보는 고층빌딩의 야경은 이방인에게 낯선 외로움을 더욱 부채질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핫한 야경명소는 동백섬 입구에 있는 ‘더베이101’이다. 광안대교의 보랏빛 조명과 마린시티의 형형색색 불빛이 바닷물에 거울처럼 비치는 모습은 휴대전화 카메라로도 충분히 멋지게 담긴다.

‘더베이 101’에서 바라본 마린시티 야경

‘더베이 101’에서 바라본 마린시티 야경



◆ 맛집 ◆


◇ F1963=부산 수영구 망미동에 있는 옛 고려제강 수영공장을 재생한 복합 문화공간. 테라로싸 커피숍, YES24서점, 복순도가, 수제맥주 프라하 등 전시장과 공연장, 대나무숲길, 달빛정원 등이 옛 공장시설과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F1963 내 테라로싸 커피숍



◇ 에그라상=촉촉한 크로아상 빵에 부드러운 계란, 햄과 블루베리가 어우러진 샌드위치가 맛있는 집. 부산 동래구 충렬사로 68.

에그라상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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