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소 동아연극상 받고 배우 꿈 키워”

김기윤 기자

입력 2020-12-29 03:00 수정 2020-12-2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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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 속 동아일보] <19> 배우 송승환
연출-제작 등 무대 안팎 종횡무진… ‘난타’ 세계적 공연 키워내기도
9년만에 연극 ‘더 드레서’ 무대에… 시력 나빠져 대사 전부 외워


송승환 배우가 1969년 3월 8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동아연극상 특별상 수상 기사를 들고 있다. 그는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지만 부모님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격려해 주셨기 때문에 지금껏 무대에 설 수 있었다”고 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동아연극상이 나침반을 잡아줬죠. 나는 배우를 해야 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올 연말 연극 ‘더 드레서’에서 ‘선생님(Sir)’ 역할을 맡아 희끗희끗 수염을 기른 신사. 52년 전 연극 ‘학마을 사람들’ 무대에 올랐던 순간을 떠올리자 얼굴에 소년 같은 미소가 스쳤다.

그 이듬해인 1969년, 12세 소년이던 송승환(63)은 동아연극상 역대 최연소 특별상을 받으며 배우를 꿈꾼다. “공부에 지장 없는 범위에서 연극을 계속하겠다”던 수상 소감의 약속을 지켜냈다. 배우, 연출자, 제작사 대표로 그는 늘 극장 안팎에 머물렀다. 최근 서울 중구 정동극장에서 만난 그는 “어른들이 ‘잘한다’ ‘잘한다’ 하고 동아연극상까지 받으니 그게 좋다는 건 알았다. 아마 내 인생은 그때 정해졌을 수도 있다”며 웃었다.

1965년 KBS라디오 어린이연속극으로 연기에 첫발을 들인 그는 어느 날 선배 성우 연기자들의 손에 이끌려 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에 갔다. 거기서 극단 ‘광장’을 창립한 원로 연출가 고(故) 이진순 선생을 만난다. 대뜸 ‘학마을 사람들’ 아역 복남을 맡게 됐으니 내일부터 연습실에 나오라는 말을 들었다. 첫 연극이었다.

“마냥 재밌고 신났죠. 대사에 관객이 웃고 울고 바로 반응이 오잖아요. 첫 공연 끝나고 커튼콜에서 박수 치는 관객들을 보는데 짜릿했어요.”

연출자 겸 배우로 ‘극단 76단’ 생활을 하며 방송 연기자를 하는 동시에 라디오 MC로 활동 반경을 넓혔다. 이후 공연 제작에 흥미를 느낀 그는 ‘난타’를 세계적 공연으로 키웠다.

“내게 남은 게 아무것도 없어.”

‘더 드레서’에서 그의 마음에 가장 와 닿은 대사. 그는 “나이 때문에 공허한 마음도 있었고, ‘세상 떠날 때 어떤 얘기를 해야 하나’ ‘나는 잘 살고 있나’를 돌아보게 한 대사”라고 했다.

그는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을 맡은 뒤 황반변성,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력이 나빠져 현재 글자도 보기 어렵다. 상대역 표정을 읽으려면 상대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뜯어봐야 한다. ‘남은 게 없는’ 절망적 상황에서 무대를 다시 떠올렸다. 연극이 더욱 고파졌다. 9년 만의 무대 복귀였던 이번 연극의 첫 대본 리딩을 할 때, 대사를 다 외워서 갔다. 베테랑 배우들인 후배 안재욱 오만석 배해선 정재은 등이 깜짝 놀랐다. 이들이 바짝 긴장해 바로 다음 만남에서 대사를 다 외워 왔다고 한다.

“눈이 잘 안 보이게 되면서 배우 표정이나 무대가 잘 안 보이니 연출은 힘들어졌어요. 그런데 연기는 제 세계 안에서 상상하고 몸짓하면 되잖아요. 연기에 더 잘 몰입할 수 있었죠.”

11월 시작된 ‘더 드레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12월 중순 중단됐다. 당초 29일부터 6일간 공연을 재개할 계획이었으나 결국 불가능해졌다. 20세기 후반 최고 연극의 하나로 꼽히는 이 작품은 노배우 ‘선생님’과 그의 드레서 ‘노먼’을 중심으로 한 연극 속 연극. 그는 “작품 배경인 2차 세계대전과 현재의 팬데믹 상황이 비슷하다. 공연을 꼭 올리겠다는 연극인들의 투철한 신념도 닮았다”고 했다.

‘연기는 나를 버리고 그 인물이 되는 과정’이라는 그는 “노배우 역할과 송승환이 점점 더 하나가 되는 느낌”이라고 했다. ‘연극에 관한 연극(메타연극)’인 작품은 송승환과 만나 비로소 ‘메타 송승환’이 됐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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