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미국에서 독일계가 1위인 까닭?

뉴스1

입력 2020-11-05 14:26 수정 2020-11-05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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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지도. 중앙부 캐나다와 인접한 지역에 노스다코타가 보인다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3개월에 한번씩 만나는 모임이 있다. 참석자들은 나보다 사회 경력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다. 멘토 그룹 중 하나인 이 모임에 가면 나는 언제나 학생이 된다. 모임이 끝나면 귀한 메모가 수북이 쌓인다.

점심을 먹으며 주고받는 대화의 화제는 세계사, 인문지리, 문화예술, 여행 등이다. 이 모임의 좌장 격인 사람이 신용석 상미회 회장·인천개항박물관 관장이다. 신문사 파리특파원을 오래 지낸 그는 앙드레 모루아의 ‘미국사’ ‘영국사’ ‘프랑스사’의 번역자다.

얼마 전 서울 인사동 한정식집에서 점심을 했다. 이날 초대 손님으로는 대형로펌에서 유럽팀장을 맡은 파리 태생의 한국계 프랑스 변호사가 참석했다. 모임이 끝날 때쯤이면 반드시 나오는 게 미국 52개주 주도(州都) 맞히기다. 수도나 주도 맞히기 게임은 나이를 불문하고 언제나 재미있다. 내가 물었다.

- 남부 루이지애나 주의 주도는?

“바통 루즈(Baton Rouge).”

바통 루즈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이어진다.

-‘큰 바위 얼굴’이 있는 사우스다코타 주의 주도는?

“피어(Pierre).”

나는 솔직히 ‘피어’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스다코타 주’의 주도는 알고 있었다.

- 그러면 노스다코타 주의 주도는?

“(조금 생각하다가) 비스마르크.”

참석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신 회장은 이어 왜 주도가 비스마르크가 됐는지에 대한 짤막한 브리핑을 했다. 나는 ‘왜 비스마르크가 도시 이름에?’라고 의문을 가졌지만, 이것을 탐구심으로 발전시키진 못했다.

그러자 일순 화제가 바뀌었다. 이민으로 이뤄진 미국의 민족별 순위였다. 누군가 말했다. “독일계가 제일 많다.” 참석자 대부분이 동의했다. “트럼프도 독일계 아니냐?” “헨리 키신저도 있다.” “가수 빌리 조엘도 독일계다.” 2차 세계대전의 영웅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도 나왔고, 핵폭탄을 개발한 노벨상 수상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도 나왔다.

2위와 3위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2위는 앵글로색슨이고, 3위는 아이리시, 4위 이탈리안…. 그러자 또 다른 참석자가 스마트폰으로 최신 자료를 검색하더니 읽어준다.

“독일계 15.2%, 아이리시 10.8%, 아프리카 흑인 8.8%…”

우리는 일반적으로 앵글로 색슨(Anglo-saxon)이나 아이리시(Irish)가 미국을 구성하는 민족 순위에서 최상위를 차지할 거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독일계(German)가 민족 비율에서 가장 많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독립전쟁서 영국군을 지원한 독일 용병들

몽골계 원주민이 살던 신대륙에 독일인이 들어오게 된 계기는 미국 독립전쟁이었다. 1775년 영국 식민지인 신대륙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대영제국 입장에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왕정(王政) 체제를 유지하던 유럽 국가에도 영국 식민지에서의 반란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유럽 왕정 국가들 중 일부가 영국군을 지원하기로 결의한다. 그중 주목해야 할 왕국들이 독일어권 국가들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느슨한 울타리 속에 있던 이들 군소(群小) 왕국·공국들은 생존을 위해 저마다 강대국들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뮌헨을 품고 있는 남쪽의 바이에른, 중부의 작센, 북쪽의 프로이센 등이 이들 중 최강이었다.

식민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영국 왕은 독일계인 조지 3세. 영국은 당시 헤센카셀, 헤센하나우, 브라운슈바이크, 안스바흐·바이로이트 공국들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브라운슈바이크의 공작 페르디난트는 조지 3세의 처남. 페르디난트가 조지 3세에게 반란군 진압에 필요한 군대를 보내겠다고 선언했다. 브라운슈바이크는 5700여 명을 파병했다. 이어 헤센카셀은 최대 규모인 1만6000명, 헤센하우는 2400여 명의 용병을 각각 보냈다. 이렇게 영국과 동맹 관계를 맺고 있던 독일어권 제후국들이 신대륙에 보낸 병력은 3만명에 달했다. 용병들에는 최고의 대우를 보장했다.

식민지 민병대원들에 독일계 용병의 출현은 충격이었다. 신대륙에 도착한 용병들은 영국군에 통합되어 롱아일랜드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 독립전쟁에서 프랑스는 영국과 맞서는 대륙군을 지원했다. 미국 독립전쟁은 유럽의 여러 나라의 이해관계가 뒤엉킨 국제전의 양상을 띄었다. 결과는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대륙 군의 승리로 끝났다. 미국은 마침내 자유를 쟁취했다.

문제는 독일계 용병들의 선택이었다. 귀국선을 탈 것인가? 신생국 미국에 남을 것인가? 조국으로 돌아가 봐야 갈기갈기 분열된 나라에서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상당수가 미국에 남기를 희망했다. 영국왕 조지 3세는 대륙군 지도자 조지 워싱턴에게 독일인들이 미국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청을 넣었다. 헤센카셀의 용병 6500여 명, 브라운슈바이크의 용병 3100명 등 1만명이 넘는 독일계들이 기회의 땅 미국을 선택했다.

눌러앉기로 작정한 독일계들은 지역을 선택해야 했다. 어디 가서 살 것인가. 남쪽 조지아부터 북쪽 매사추세츠·메인까지 대서양에 면한 살기 좋은 땅은 영국과 맞섰던 아이리시·앵글로색슨이 이미 주류로 터 잡고 있었다. 껄끄러운 이들과 부딪치지 않으려면 대륙 안쪽으로 더 들어가야 했다. 용병 출신 독일계들은 그렇게 아이리시와 앵글로색슨이 비교적 적은 캔사스, 오클라호마, 네브래스카 등으로 들어가 삶을 이어갔다.

‘볼가 저먼’, 대서양을 건너다

여기에 또 다른 독일인들이 신대륙에 상륙한다. 이름하여 ‘볼가 독일인’이다. 이야기의 뿌리는 제정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1729~1796)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편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 예카테리나 2세는 재위(在位) 동안 제정러시아의 영토를 확장한 군주로 평가된다.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독일 사람들을 강제로 사람이 살지 않는 볼가강 주변으로 이주시켰다. 졸지에 독일인들은 고향을 떠나 러시아 땅에서 살아가야 했다. 이들을 ‘볼가 저먼’(Volga German)이라 부른다.

러시아 땅에서 타향살이의 설움 속에 살던 독일인들은 안전하고 자유로운 곳으로 이주를 결행한다. 신생국 미국이었다. 1880년대 남부여대(男負女戴) 범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넜다.

이들은 이미 독일계 용병 출신들이 자리를 잡은 미대륙 중부로 들어가 네브래스카, 캔사스, 다코타에 흩어졌다. 이 3개 주를 ‘볼가 저먼 트라이앵글’이라 부른다. 일부는 캐나다의 앨버타·새스캐츠완·마니노바로 올라갔다.

다코타는 1880년대 후반까지 미합중국 연방에 속하지 않았다. 다코타 준주(territory)였다. 북태평양철도회사가 철도를 건설하면서 다코타 준주의 주도에 비스마르크라는 이름을 붙였다. 독일계 이민자들을 유치하려는 포석이었다. 1889년 노스다코타가 미국연방에 편입되면서 비스마르크가 주도가 된다. 미국 52개 주도 중에서 외국 정치가의 이름을 딴 유일한 주가 노스다코타다.

우리가 아는 ‘볼가 저먼’의 후손들로는 가수 겸 작곡가 존 덴버, ‘이글스’ 기타리스트 랜디 메이스너 등이 있다. 랜디 메이스너는 네브래스카 출신이다. 존 덴버가 부모에게 받은 이름은 ‘헨리 존 도이치쉔도르프 주니어’. 가수로 데뷔하며 미국식 이름인 존 덴버로 바꿨다. 체코계 이민 2세인 앤디 워홀이 피츠버그에서 뉴욕에 진출하면서 체코식 이름인 ‘앤드류 워홀라’를 미국식 이름인 앤디 워홀로 바꾼 것과 같다.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독일인들은 불안한 조국을 등지고 대서양을 건너는 배를 탔다. 독일 용병, 볼가 저먼, 20세기 독일 이민자 …. 그들의 후예들이 지금 민족 순위에서 상위를 차지한다.

가만히 생각하면 존 덴버의 이목구비가 아이리시나 앵글로색슨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린 시절, 존 덴버의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저 가수는 미국 사람인데 이상하게 미국 사람 같지 않게 생겼네’라고 혼자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지금 와서 보니 존 덴버는 전형적인 ‘볼가 저먼’의 골상(骨相)이다.

“독일계 15.2%, 아이리시 10.8%, 아프리카 흑인 8.8%…”

혈통으로 보면,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는 독일계(도널드 트럼프)와 아이리시(조 바이든)의 대결이었다.

(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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