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 등록 러시아 코로나 백신에…“물보다 나을 게 없다” 비판도

파리=김윤종 특파원

입력 2020-08-12 18:28:00 수정 2020-08-12 18:47:31

|
폰트
|
뉴스듣기
|
기사공유 | 
  • 페이스북
  • 트위터

러시아가 11일 세계 최초로 공식 등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을 두고 러시아와 서구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다. 3상 시험을 거치지 않은 이 백신을 두고 미국, 영국 등에서 “물보다 나을 게 없다” “러시아 산 접종은 러시안 룰렛”고 비판하자 러시아 측은 “서방이 우리의 성과를 조직적으로 폄훼하고 있다”고 맞섰다.

영국 가디언 등에 따르면 세계 백신 전문가들은 이날 러시아 백신 등록에 대해 우려와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대니 알트만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의 면역학 교수는 “인류를 구하기 위한 백신일지라도 악마가 디테일에 있고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며 “그러나 러시아 백신에서 정보나 전문가 검토도 없었다. 안전성과 효과가 검증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생길 것”이라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러시아 백신을 맹물에 비유하기도 했다. 영국 서섹스대 과학정책연구단 오히드 야쿱 수석강사는 더선과에 “3상 시험 생략은 전례가 없는 일”며 “자칫 물보다 나을 게 없는 백신이 사람들에게 접종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1, 2, 3상 임상시험은 의약품 개발의 국제표준이다. 3상에서 대규모 인원을 대상으로 백신의 안전성을 최종 승인해야 상용화가 가능하다. 대부분 제약사들이 3상 시험을 실시한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자국 백신이 이달 초까지 2상 시험을 거쳤다고 발표했을 뿐 백신 관련 세부 데이터를 공개하지 않았다.

바이러스 연구 국제단체 ‘글로벌 바이러스 네트워크’ 콘스탄틴 추마코프 연구원은 워싱턴포스트(WP) 인터뷰에서 “3상을 거치지 않고는 안전하고 효과있는 백신을 증명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충분한 검증없이 러시아 백신을 접종하는 것은 ‘러시안 룰렛’ 즉 도박이라고 비판했다. 산제이 굽타 CNN 의학담당 기자도 “아무 정보가 없는 러시아 백신은 2014년 에볼라 백신 개발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했다. 당시 3상 결과가 나오지 못하면서 백신개발이 지지부진했다.

비판이 쏟아지자 러시아는 시기어린 비방이라고 반박했다. 타스통신에 따르면 러시아 국부펀드 직접투자펀드(RDIF) 키릴 드미트리예프 대표는 이날 “러시아 백신에 대해 조직적이고 치밀한 정보 공격이 이뤄지면서 백신 개발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 있다”며 “서방 국가들의 정치적 접근은 오히려 그들의 시민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지게 할 것”이라 밝혔다.

백신 무료 지원을 약속받은 필리핀도 러시아 지원 사격에 나섰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러시아 백신을 두둔하고 나섰다. 그는 이날 자국 내 TV연설을 통해 “푸틴 대통령이 백신 무상 공급을 제안했다”며 “내가 첫 시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누적 확진자가 14만 명에 육박하는 등 동남아시아 중 감염자가 가장 많아진 자국 상황을 의식한 행보로 보인다.

러시아는 서방국가들이 정치적 공세를 한다고 비방했지만, 일각에서 러시아 정부가 먼저 백신 개발을 정치 도구화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러시아가 개발한 백신 이름은 ‘스푸트니크V’(Sputnik V). 옛 소련 시절인 1957년 인류 최초로 쏘아올린 인공위성 ‘스푸트니크’에서 따온 명칭으로, 냉전시대 속 미국과 소련의 경쟁을 상징한다.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미국 정부를 철저히 의식해 붙여진 이름인 셈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러시아 백신의 명칭은 국가적 자존심과 전 세계적 백신 경쟁을 상징한다”고 전했다. 실제 미국 제약사인 모더나와 존슨&존슨, 화이자, 노바백스, 영국 제약사 아즈트라제네카, 프랑스 사노피, 독일 바이오N테크 등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이미 57억회 분의 백신이 전 세계적으로 사전 주문됐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국제 공조보다 코로나19 첫 백신 개발국이 되는 것이 각국의 목표”라며 백신 민족주의‘ 나아가 ’백신 패권주의‘가 득세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여기에 곳곳에서 코로나19 변이가 발견되고 있다. 백신이 개발돼도 면역력을 유지시키지 못할 가능성이 적지 않은 가운데 각국이 머니게임에만 몰두하고 있는 셈이다.

논란이 가열되자 세계보건기구(WHO) 일단 러시아 백신에 대한 의학적 검증부터 실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백신 개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면서 각국마다 검증을 소홀히 하는 상황이 속출하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다. 타릭 야사레비치 WHO 대변인은 “러시아 당국과 백신에 대한 사전 자격 심사 절차(pre-qualification)를 논의 중”이라며 “안전성과 효능에 대한 엄격한 검토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 임상시험기구연합(ACTO)도 3상 시험이 완료될 때까지 승인 연기를 촉구하는 서한을 11일 러시아 정부에 보냈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파리=김윤종 특파원zozo@donga.com

라이프



모바일 버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