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뉴딜은 진보 집권 다진 정치 전환점… 한국 뉴딜은 어디로[인사이드&인사이트]

최혜령 경제부 기자

입력 2020-06-15 03:00 수정 2021-01-27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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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딜 정책의 정치경제학

최혜령 경제부 기자
“오늘날 같은 불행한 시대에는 경제 피라미드의 바닥에 있는 ‘잊혀진 사람(forgotten man)’에 대한 대책이 필요합니다.”

1932년 4월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민주당 대선 후보 도전을 선언한 라디오 연설에서 이같이 밝혔다. 그의 발언은 1929년 대공황 이후 빚더미와 생활고에 짓눌린 노동자, 농민, 가톨릭교도, 흑인 유권자 등 소외된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루스벨트는 이들을 위한 정책을 펴고 있다는 사실을 이후에도 수차례 강조했다. ‘잊혀진 사람’이었던 이들은 거대한 ‘뉴딜 연합’을 이뤄 50년 가까이 민주당 정권을 떠받쳤다.

미국의 뉴딜 정책은 흔히 정부가 재정을 풀어 대규모 공공 일자리를 만들고 건설과 토목공사를 일으킨 경제사업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좀 더 깊숙하게 들여다보면 노동자를 보호하고 복지제도의 근간을 만들어 해당 정책의 수혜자들을 지지 기반으로 흡수한 정치적 전환점이었다. 학계 등에서 한국판 뉴딜을 주목하고 있는 것도 이런 차원이다. 76조 원을 투입하는 이번 사업이 단순히 경제 회복 수단에 그칠지, 미국처럼 정치적 포석의 첫걸음인지가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 기대에 못 미친 1기 뉴딜

1929년 10월 24일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주가가 폭락하면서 시작된 대공황으로 미국에서는 실업자가 넘쳐나고 물가가 폭락했다. 뉴욕 주지사였던 루스벨트는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자마자 “여러분에게 미국 시민들을 위한 뉴딜을 약속합니다. 단지 표를 더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를 주인에게 돌려주는 개혁에 승리하기 위해서 말입니다”라고 뉴딜을 전면에 내세웠다.

뉴딜 정책은 1933년 루스벨트가 취임한 후 시작된 1기와 1935년부터 시작된 2기로 나뉜다. 1, 2기를 관통하는 기본 방향은 빈곤과 실업의 구제(relief), 산업질서와 경제의 회복(recovery), 근본적인 제도개혁(reform)의 3R였다.

1기에는 농민 및 노동자의 일자리와 소득을 유지하는 정책이 대부분이었다. 농산물 생산량을 조절해 가격 폭락을 막았다. 남아도는 곡물은 정부가 사들이고 농사를 쉬는 농민에게는 보조금을 줬다. 연방긴급구제국을 설립해 실업자들에게 식량과 옷 등을 보내는 데 5억 달러를 투입했다.

긴급은행법 제정 등 금융 시스템도 정비했다. 은행이 파산해도 예금자들이 돈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설립했다. 증시를 통제하기 위해 증권거래위원회(SEC)를 만들었다.

뉴딜 하면 떠오르는 테네시강 유역 개발과 후버댐 건설에 나서 대규모 공공일자리를 만든 것도 이 시기다. 노동자들에게 소득을 보장하는 한편 값싼 전력을 대량 공급하고 홍수를 예방했다.

이 기간 동안 루스벨트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실업자 수가 줄어들지 않았다. 정부가 일자리를 만들어내도 해고가 계속돼 실업자 수에 큰 변화가 없었다. 미국 정부는 한쪽에서는 경제 시스템을 바꾸지 못했다는 지적을, 다른 한쪽에서는 개입이 지나쳐 기업가 정신을 억누른다는 비판을 받았다.

○ ‘잊혀진 사람’이 뉴딜 연합으로

1936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시작된 2차 뉴딜은 각종 제도를 개혁(reform)해 진보 성향의 민주당 지지층에 훨씬 가깝게 다가갔다. 1935년에는 와그너법이라고 불리는 전국산업부흥법을 제정해 사상 처음으로 노동조합결성권과 단체교섭권을 보장했다. 여기에는 소득 인상을 용이하게 해 수요를 창출하려는 경제적인 의도도 깔려 있었다. 시간당 40센트의 최저임금과 법정 최고 노동시간도 도입했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과 맥을 같이하는 이 법은 1935년 위헌 판결을 받았지만 다시 제정돼 결국 합헌 판결을 받았다.

당시 미국에서는 총 노동인구의 15%인 1100만 명이 실업자였지만 주정부의 구호기금은 대부분 바닥 난 상태였다. 사업주에게서 걷은 세금과 연방정부 재원을 합해 매월 최대 20달러의 실업급여를 제공하는 내용의 사회보장법이 제정됐다. 고령자, 은퇴자, 장애인에게 주는 연금도 도입됐다. 미국 복지제도의 토대를 만든 것이다.

반면 부유층에게는 고율의 세금을 물렸다. 연간 5만 달러 이상의 개인소득에 누진과세를 도입했다. 500만 달러 이상의 초고소득에는 최고 79%에 이르는 소득세를 물렸다.

일자리 창출도 계속됐다. 공공사업진흥청은 도로와 다리를 놓고 공항과 병원을 지어 끊임없이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17∼28세의 청년층에게는 산에서 벌목하거나 화재 진압을 하는 일자리를 마련해줬다. 배우와 화가, 음악가 등에게는 문화사업을 추진해 각종 공연과 창작을 지원했다. 1936년 치러진 대선에서 루스벨트는 1932년보다 더 큰 표차로 재선에 성공했다.

뉴딜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뉴딜이 오히려 경제 회복을 더디게 했고, 미국이 대공황에서 탈출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덕분이었다는 주장이 적지 않다. 하지만 뉴딜이 미국 민주당의 지지 기반을 넓혔다는 점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거의 없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난 후 민주당의 표밭은 남부의 농민들이었다. 그러다 1920년대 호황기를 거치면서 미국 내에는 도시노동자와 빈곤층, 이민자들이 늘어났다. 뉴딜이 제공한 일자리와 노동권, 사회보장제도는 이들의 팍팍한 생활을 파고들었다.

진보 성향을 가진 도시의 중산층과 지식인들도 정치 지향이 비슷한 뉴딜 정책에 지지를 보냈다. 산업계에서도 정부 지원이 필요한 석유, 해운, 자동차 산업 등 신흥 산업이 뉴딜과 민주당에 합류했다. 이후 뉴딜 연합은 짧게 보면 보수층이 뭉친 1960년대까지 약 30년, 길게 보면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등장까지 약 50년간 이어졌다.

○ 아직은 정치사업과 경제사업의 중간에 있는 한국판 뉴딜

이달 초 정부는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 고용안전망 강화에 2025년까지 총 76조 원을 투입한다는 내용의 한국판 뉴딜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현 정부 마지막 해인 2022년까지 일자리 55만 개를 만든다는 계획도 포함됐다.

한국판 뉴딜은 현재로선 기획재정부가 주도하는 경제사업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에는 미국 뉴딜이 그랬듯 한국판 뉴딜 역시 정치지형의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는 맥락도 감지된다. 문 대통령이 한국판 뉴딜을 발표하면서 “사람이 우선이고 포용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루스벨트의 뉴딜과 일맥상통한다. 또 “단순히 위기 국면을 극복하는 프로젝트를 넘어서는, 총체적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대전환을 이뤄내게 하는 미래 비전”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근본적으로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은 모두 사람을 위한 것이다. 전 국민 고용보험의 기초를 놓는 등 고용안전망을 대대적으로 확충하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위한 사람 투자를 확대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포용국가의 기반으로 제시된 것은 전 국민 고용보험이다. 올 5월 기준 고용보험 가입자는 1382만 명으로 전체 경제활동인구 2821만 명의 절반에 못 미친다. 전 국민 고용보험이 현실화되면 아직 가입하지 않은 특수고용직 9개 업종 63만 명이 우선 수혜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장기적으로는 자영업자와 무급가족종사자 680만 명이 실업급여를 받는 등 사회안전망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이들과 그 가족들이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면 든든한 기반을 얻을 수 있는 셈이다.

반면 디지털과 그린 뉴딜 등 다른 내용은 아직까지는 기존 사업과 큰 차이가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5세대(5G) 이동통신 국가망 확산과 농어촌 초고속 인터넷망 설치, 공공시설물 에너지 효율 개선 등은 이전부터 추진됐거나 이미 시행 중이다. 산업혁신 효과가 큰 원격의료 도입이나 수도권 규제 완화 등도 대책에서 빠졌다. 전체 예산 76조 원 중 다음 정권인 2023∼2025년에 45조 원을 쏟아붓는다는 계획이지만 차기 정부에서 힘을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 때문에 여권 내부에서도 한국판 뉴딜에 보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정책 방향이 알려진 5월 초, 더불어시민당의 공동대표를 지낸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내용을 들여다보면 혁신성장을 재포장한 것이고 근본적인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뉴딜을 산업투자 정도로만 이해하는 게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오히려 포용적인 측면은 더 축소되는 것 아닌가 하는 지적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뉴딜 정책을 선별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미국의 뉴딜은 복지제도와 예금보호 등은 효과가 있었지만 정부 개입이 지나쳐 오히려 경기 회복에 방해가 된 점도 있었다”면서 “일단 경제 효과가 검증된 것 중심으로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재정건전성을 악화시키면서 돈을 푸는 정책을 계속하면 한국판 뉴딜의 성공 여부는 회의적일 것”이라면서 “정책이 성공하면 정치적 지지는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라고 했다.


최혜령 경제부 기자 hersto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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