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에 지친 사람들이 봄꽃에 열광하는 이유[전승훈 기자의 내 삶을 바꾼 예술]

전승훈 기자

입력 2020-04-04 14:00 수정 2020-04-30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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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 대화방같은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에는 아파트 화단이나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 목련꽃, 노란 개나리꽃, 산길에 핀 분홍 진달래꽃 사진이 앞다퉈 올라오고 있다. 매년 피는 꽃인데도 올해는 유난히 소중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코로나19가 창궐하는 비참한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기 때문인 것 같다. 사람들이 마치 꽃이 역병을 물러나게 해줄 희망인 것처럼 간절한 마음을 담아 사진을 올린다. 그래서인지 주말마다 북한산에는 그동안 산을 찾지 않았던 10대, 20대 젊은이들까지 북적댄다.

“봄이 되자, 사실 사람들은 이제나 저제나 하고 병의 종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질병이 얼마나 더 계속될지 물어보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병이 얼마나 더 오래 갈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날이 지남에 따라서 그 불행에는 정말 끝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시작되었고, 그래서 동시에 페스트의 종말이라는 것이 모든 희망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알베르 카뮈 ‘페스트’)

북한산에 핀 봄꽃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알베르 카뮈의 1947년 작 ‘페스트’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오랑 시(市)가 페스트로 봉쇄된 후 절망과 고통, 투쟁 등 다양한 시민들의 반응을 그려낸 소설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세계를 휩쓰는 가운데 ‘페스트’는 지구촌 독자들이 열독하는 글로벌 베스트셀러로 떠오르며 재조명받고 있다.

이 소설에서 시민들은 도시봉쇄 초기에는 마치 긴 휴가나 축제를 맞은 것처럼 들뜬 분위기다. 그러나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고, 격리생활이 수개월간 지속되자 사람들은 점차 현실에 무감각해진다. 그러면서 낮게 속삭인다. “저들이 하는 소리가 들리시죠? 페스트가 가고 나면 이걸 해야지. 페스트가 가고 나면 저걸 해야지 하는 소리 말입니다….”

‘격리’는 영어로 ‘록다운(lockdown)’ ‘쿼런틴(quarantine)’이라고 표현한다. ‘lockdown’은 말 그대로 창문과 대문을 꼭 잠그고 집 안에 콕 틀어박혀 있는 상태를 말한다. ‘quarantine’은 숫자 ‘40’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quaranta, ‘40일간’을 뜻하는 quarantina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흑사병(페스트)이 창궐하던 중세 유럽에서 이탈리아 베네치아, 제노바, 프랑스 마르세유 등 항구에서 배들은 검역당국의 검사를 받고 40일간 격리된 후에 입항하도록 했다고 한다.

2월18일 대구에서 31번째 확진자가 나온 이후로 코로나가 확산돼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된지 벌써 40일 이상이 훌쩍 지나갔다. ‘qurantine’ 기간이 지난 셈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는 코로나의 불똥이 언제 또 엄습해올지 몰라 공포는 쉽게 사그러들지 않는다.

봄이 왔지만 프로야구 중계도 없고, 유럽축구 리그도 멈추고, 공공도서관, 문화체육센터, 전시장, 콘서트장이 모두 문을 닫았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도시, 집 안에 갇혀 버린 사람들은 그동안 공짜처럼 주어졌던 맑은 물과 공기, 평범했던 일상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 새삼 깨닫는다. 웬만한 약속이 전부 취소되고 퇴근 후 곧장 귀가하거나 재택근무를 하는 요즘. 지난날 왜 그렇게 바쁘게 지냈는지 기억이 까마득하다. ‘페스트’의 주인공도 적막한 도시에서 과거의 흥청거리던 삶을 기이한 듯 떠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너도나도 고급 식당으로 몰려들어서는 거기에 들어가서 늦도록 노닥거리는 그들의 만족감, 매일같이 영화관 앞에 모여들어 줄을 짓고, 모든 연예장에서 댄스홀에 이르기까지 만원을 이루었다가 모든 공공장소마다 성난 죄수처럼 풀려나오는 인파, 모든 접촉에 대해서 느끼는 뜨악한 감정, 그러면서도 한편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에게로, 팔꿈치를 팔꿈치에게로, 이성(異性)을 이성에게로 밀어가는 인간적인 체온에 대한 열망….”

서울의 일상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코로나19’로 ‘저녁이 있는 삶’이 강제로 주어졌다. 주5일 근무제, 주52시간 근무제도 해내지 못했던 뜻밖의 성과(?)다. 개학이 늦어지고, 학원도 문닫은 상황에서 아이의 얼굴을 이렇게 오랫동안 마주하게 된 게 언제였던가 생각해본다.

뭉크 ‘절규’

르누아르 ‘피아노치는 소녀들’

‘그림 읽어주는 여자’로 유명한 화가 한젬마 씨는 최근 동아일보에 연재하는 칼럼 ‘렛츠 콜라보’에서 현재의 상황을 두 가지 그림의 콜라보로 해석했다. 뭉크의 ‘절규’와 르누아르의 ‘피아노 치는 소녀들’이다. 전 세계가 바이러스로 출렁이고, 너나 없는 공포와 불안감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뭉크의 ‘절규’와 딱 맞아 떨어진다. 반면 르누와르 그림 속 ‘피아노 치는 소녀들’처럼 집 안에서는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여 서로 대화하고, 놀아주고, 요리하는 사랑스럽고 여유로운 일상이 펼쳐지기도 한다. ‘불협화음’과 ‘공존’이 엇갈리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현실개척의 동력을 찾아보자는 칼럼이었다.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200324/100332651/1 참조)

올해 초. 강릉 연곡해변에서 떠오르는 새해 첫 일출을 보면서 나의 올해 목표를 ‘매력 중년’으로 정했다. 100세 인생이라면 딱 절반인 오십을 넘겼다. 말 그대로 중년(中年)이다. 매력을 돈으로, 외모로, 패션으로만 완성할 수는 없다. 건강하면서도, 멋진 취향이 있고, 끊임없이 배우는 도전이 매력적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한번쯤 배워보고 싶었던 ‘버킷 리스트’를 더 이상 미루지 않으리라.

새해 다짐은 보통 작심삼일, 길어봤자 한달을 못간다. 그런데 올해는 코로나 사태로 인한 격리생활이 예상치 않는 기회를 주었다. 넷플릭스의 영화, 드라마 시리즈에 지쳐갈 무렵, 유튜브에서 신세계를 발견했다. 아들이 갖고 있는 ‘베이스 기타’를 나도 만지작거리다 배우기 시작했다. 유튜브에는 고수가 악보와 동영상으로 연주법을 설명해주는 친절한 강의가 무지무지하게 널려 있는 걸 발견했다. ‘1일 1드로잉’이라는 책을 사놓고 유튜브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며 하루 한 장 씩 그려나가던 그림도 어느덧 스케치북에 꽤 쌓였다.

손으로 연필과 펜을 쥐고 그림을 그리고, 손가락으로 베이스의 코드를 바쁘게 누르면서 뇌 속에 그동안 없던 새로운 회로가 생기는 것을 느낀다. 색깔과 형태, 박자와 리듬을 내 스스로 만들어내면서, 그동안 평생 잠자고 있던 내 뇌의 구석진 한 부분에 새로운 자극이 주어지는 것을 느낀다. 인간의 뇌는 정말 나이와 상관없이 끊임없이 개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중이다.

전문가들은 ‘코로나 이후 세계’는 분명 달라질 것이라 예측한다. 전염병에 속수무책 당하고 있는 선진국들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공중보건 통제능력에 대한 전체주의와 민주주적 체제에 대한 논란은 가열되고 있다. 경제적 충격은 말할 것도 없고, 온라인 수업과 재택근무로 학교 교육과 직장 근무형태, 가정생활까지 광범위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물론 ‘저녁의 시간’은 코로나 사태가 끝난 후에 빠르게 예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집콕하면서 겪었던 ‘슬기로운 격리생활’의 교훈을 잊지 않으려 한다. 서점가에는 몇년 전부터 찰스 두히그, 제임스 클리어 등의 저자가 쓴 ‘습관’의 힘을 보여주는 책들이 주목을 받아왔다. 우리의 뇌는 기존의 습관을 고집하기 때문에 성인이 된 후 새로운 걸 배우기란 무척 어렵다. 그러나 새로움이 어느정도 기간 이상 지속된다면, 습관으로 정착하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이 코너를 통해 예술로 삶을 바꿔가는 사람들, 새로운 배움과 도전에 나서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연재하려고 한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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