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 잡힌 건 여당인데 부담은 국민이 진다[오늘과 내일/고기정]

고기정 경제부장

입력 2020-02-03 03:00 수정 2020-02-0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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企銀노조 투쟁은 與 위선적 정의가 빌미
권력욕과 맞바꾼 퍼주기는 지금도 계속


고기정 경제부장
지난달 IBK기업은행 노조의 신임 행장 출근 저지 투쟁은 적폐청산 운동처럼 시작했다가 제 몫 챙기기로 끝났다. 노조는 정부가 모피아(옛 재무부+마피아) 인사인 윤종원 행장을 낙하산으로 내려보냈다며 당정청 사과를 요구했으나 문재인 대통령은 “인사권은 정부에 있다”고 일축했다. 그럼에도 노조는 “공기업을 권력에 예속시키지 않고 금융을 정치에 편입시키지 말라”고 밀어붙였고, 결국 여당 원내대표가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백기를 들었다. 27일간의 출근 저지 투쟁에서 노조가 얻은 전리품은 윤 행장 임명 철회가 아니라 노조추천이사제 도입 등 6개 합의사항이었다. 노조는 윤 행장 취임식 때 “두 팔 벌려 환영한다”고 했다.

정책금융기관인 기업은행 노조는 강성 조직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만나 본 김형선 노조위원장만 해도 합리적인 화이트칼라 은행원이다. 더욱이 행장 임명권은 엄연히 정부의 권한이다. 중소기업은행법은 ‘은행장은 금융위원회 위원장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면(任免)한다’고 돼 있다. 이 때문에 노조의 낙하산 반대는 불법적이다. 윤 행장도 금융 관련 경력이 짧다고는 하지만 대통령경제금융비서관과 경제수석을 지낸 데다 홍남기 경제부총리의 행시 선배여서 기업은행으로선 든든한 바람막이가 될 수 있다. 그동안 행장의 출신 성분에 따라 기업은행 실적이 갈렸던 것도 아니다. 최근 3명의 행장을 빼면 기업은행장은 그동안 줄곧 외부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노조가 역대 최장기 투쟁을 할 만한 동인도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완승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동력은 집권세력의 위선에서 나왔다.

2013년 민주당은 박근혜 정부가 허경욱 전 기획재정부 차관을 기업은행장으로 임명하려 하자 ‘관치는 독극물이고 발암물질과 같은 것이다. 좋은 관치가 있다는 말은 좋은 독극물, 좋은 발암물질이 있다는 것처럼 어불성설이다’고 반발했다. 허 전 차관의 임명은 성사되지 않았다. 이어 2017년 더불어주당 문재인 대선캠프는 금융노조와 정책협약을 맺고 낙하산 인사를 근절하겠다고 했다. 민주당은 정의와 공정으로 포장한 과거의 행적과 약속 때문에 얌전한 기업은행 노조에 생각지도 않게 호구가 잡혀버린 것이다.

사실 현 집권세력의 자리 욕심과 권력욕은 과거 정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기업평가 사이트 CEO스코어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 들어 339개 공공기관의 기관장, 감사, 상임이사 중 정계 출신 기관장은 2배 이상으로 늘었고, 감사는 33% 증가했다. 경제부총리가 임명·제청한 공공기관 임원 329명 중 절반 이상이 캠코더(캠프·코드·더불어민주당 출신)라는 주장도 있다. 경제부총리가 스스로 캠코더를 선택한 게 아니라는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도 민간 금융권 임원 인사에서조차 “청와대가 누구를 밀고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는다.

위선을 무마하려면 내줄 게 있어야 한다. 3선 의원 출신으로 철도와 전혀 관련이 없던 오영식 전 코레일 사장은 취임 첫해였던 2018년 임금협약에서 임금 인상은 물론 정원 대폭 증원까지 노조의 요구사항을 대부분 들어줬다. 그가 노조와 맺은 ‘교대근무체계 개편을 위한 노사합의’가 실행되면 주 31시간만 근무하면 된다. 여기서 생기는 적자만 연간 3000억 원 이상이다.

기업은행 노사의 6대 합의사항도 사측이 먼저 제안했다고 한다. 경제관료 출신인 윤 행장의 의지라기보다는 문제를 얼른 덮어야 했던 여당이 요구했다는 말이 나온다. 호구 잡힌 건 집권세력인데 부담은 결국 국민 몫이다.

고기정 경제부장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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