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싸지, 개성 있지… 나는 얇은 집에서 산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입력 2019-10-05 03:00 수정 2019-10-0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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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얼 세대 중심 지구촌 ‘협소주택’ 열풍

서울 종로구 낙산공원에서 동대문으로 넘어가는 첫 동네. 한양도성의 고즈넉한 풍경과 숲이 어우러진 동네에 ‘세로로(SERORO)’라는 이름의 흰색 건물이 올봄에 들어섰다. 33m²(약 10평)에 불과한 땅에 5개 층을 위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협소주택이다. 신혼부부인 최민욱 씨(39·스몰러건축 소장)와 정아영 씨(34·와인 강사)는 올해 3월 결혼하면서 이 집을 짓고 입주했다. 사무실이 대학로인 남편은 서울 성곽과 낙산공원을 넘어 걸어서 출퇴근한다.

이 집은 층마다 1개의 방이 블록처럼 수직으로 쌓여 있는 형태다. 1층은 필로티 주차장, 2층은 서재 겸 작업실, 3층은 주방과 거실, 4층은 침실, 5층은 옷방과 욕실로 구성돼 있다. 2, 3층은 주로 일하거나 식사하고, 손님을 맞는 공간이고, 4, 5층은 사생활 공간이다. 최 소장은 “낮과 밤 시간대의 동선을 철저히 고려해 설계함으로써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할 일을 최소화했다”고 말했다.

각 층의 방은 불과 16.5m²(약 5평) 규모. 그러나 실제로 보면 답답하지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숲 방향으로 2개 면에 걸쳐 시원하게 뚫린 창문 때문. 창 밖의 숲에는 비가 내리고, 단풍이 들고, 눈이 내리고, 딱따구리와 족제비가 나타나기도 한다. 도로와 접한 2개 면은 프라이버시를 고려해 창문을 최대한 절제했다. 최 소장은 “이사 후 창 밖을 보며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아졌다”며 “서울로 귀농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가 협소주택을 짓기로 마음먹은 건 5년 전. 친구가 서울 강동구에서 4억 원에 오피스텔 전세도 구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다. 그는 아내와 “대출금에 치이느니 차라리 감당할 수 있는 작은 집을 짓자”고 의기투합했다. 이후 강남의 자투리땅, 강북의 산동네까지 다 뒤졌다. 드디어 대학로 사무실 인근 창신동에서 땅을 찾았다. 1930년대에 지어진 폐가였다. 지붕은 무너지고, 들고양이들의 아지트였던 이 땅을 3.3m²당 1000만 원씩 1억 원을 주고 샀다. 공사비 1억7000만 원으로 총비용은 2억7000만 원이 들었다. 서울에서 웬만한 전세도 얻기 힘든 돈이다.

그는 1년 동안 설계를 다듬으며 고심했다. 냉장고와 세탁기 등 가전제품의 크기를 미리 정해 놓고 벽체를 설계했다. 단열재는 콘크리트 외부에 시공했다. “협소주택에서는 1∼2cm도 아쉬운데, 단열재를 외부에 시공하면 단열효과도 크고, 평균 10cm 정도의 공간이 더 커진다.”

그가 새 집을 짓기 시작하자 동네사람들은 환영했다. 보기 흉했던 폐가가 ‘귀여운’ 새 건물로 탄생하는 모습을 보고 따뜻한 응원을 보낸 것이다.


○ “세상에 나쁜 땅은 없다”… 얇디얇은 집

올해 서울시 건축상을 수상한 서울 서초구 잠원동의 ‘얇디얇은 집’은 “집이란 어떤 공간에 어떤 형태를 띠어야 한다는 상식을 깬 곳”이라는 평가를 받은 곳이다. 입구 쪽 폭이 1.4∼2m에 불과한 땅에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 건물을 지었다. 반면 측면의 길이는 20m에 이른다. 그야말로 책을 한 권 세워놓은 것처럼 얇고 길쭉한 집이다.

이 집은 영상 촬영과 편집을 하는 두 부부가 같이 산다. 1층과 지하는 작업실, 2층은 거실과 부엌, 3층은 침실과 자녀방, 4층에는 지붕 테라스와 옥탑방이 있다. 복도처럼 길쭉한 집 공간이 좁게 느껴지지 않도록 화장실 욕실을 빼고는 벽이나 문을 만들지 않았다. 원래 이곳은 경부고속도로 주변 완충녹지를 만들고 남은 서울시 땅이었다. 공공부지 매각을 통해 민간에 팔렸지만 여러 건축설계사무소에서도 집을 짓는 건 불가능하다고 손을 들었던 곳이다.

“서울에서 집 짓기 좋은 땅은 이미 집이 다 들어섰다고 보면 됩니다. 좁고 길거나, 도로변 삼각형 모양의 비정형적인 필지만 남았죠. 그러나 세상에 나쁜 땅은 없습니다. 땅의 컨디션을 잘 이해하고 활용한다면 개성 넘치고 가치 있는 건물이 나올 수 있습니다.”(신민재 AnL스튜디오 소장)


○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작은 집의 혁명’

1인 가구가 늘고 부동산 가격이 치솟으면서 주택담보대출에 시달리는 밀레니얼 세대들 사이에서 삶을 다운사이징하는 작은 집 열풍은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큰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미국에서도 타이니 하우스(협소주택)는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인스타그램에서 핫한 협소주택 사진은 예쁘면서도, 친환경적이고, 미니멀한 라이프스타일로 각광받는다. 미국에서는 2017년 타이니 하우스 판매량이 67%나 증가했다. 한 채의 평균 가격은 4만6300달러(약 5500만 원). 협소주택에 사는 이들의 68%는 주택담보대출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한다.

내 집 마련이 가장 어려운 도시로 알려진 홍콩에서는 대형 콘크리트 수도관으로 만든 협소주택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홍콩의 건축사무소 ‘제임스 로 사이버텍처’가 만든 ‘오포드 튜브 하우스(OPod Tube House)’. 지름 2.5m, 길이 2.6m짜리 수도관 2개를 연결해 지은 이 집의 내부 면적은 약 9.3m²(약 2.8평). 여러 개를 쌓아올려 아파트형 타운을 만들 수도 있으며, 빌딩 틈새나 다리 밑 같은 사각지대에도 설치가 가능하다. 한 채 건설 비용은 약 1700만 원, 월 47만 원에 임대한다.

넷플릭스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Tiny House Nation(도전! 협소주택)’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그랜드 피아노는 꼭 있어야 해요” “큰 오븐이 필요해요”와 같은 출연자들의 요구를 실현시켜 주는 갖가지 아이디어가 펼쳐진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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